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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의 일기39

전공의 일기. 4-16화 폭풍 같은 새벽이 지나 새로운 아침이 시작됐다. 날은 흐렸고, 내 마음을 대변하듯 비가 쏟아질 것 같은 짙은 아침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오전 회진을 준비했다. 환자가 좋지 않은 날은 몸도, 마음도 무거웠다. 어제 죽음을 목전에 두고 출혈과 싸움을 벌였던 환자의 병실에 들어섰다. 수술 후, 하루정도 중환자실에서 경과를 관찰한 뒤 일반 병실로 옮기기로 한 상황이었기에 환자의 자리는 아직 비워두지 않고 있었다. 수술 후 환자를 맞이하기 위해 새롭게 깔아 둔 시트가 새하얗게 그리고 주름 한 점 없이 깔려있었고, 환자의 회복을 돕기 위해 보호자가 준비한 것으로 보이는 식품들이 사물함 앞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그 환자의 침대 앞에서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하고 있을 때, 병실의 담당 간호사가 말을 건넸다. ".. 2020. 8. 2.
전공의 일기. 4-15화 "JP 주세요. 양 쪽으로 하나 씩 더 넣을게요" 무거운 마음으로, 대바늘이 연결되어있는 JP catheter를 받아들었다. 복강 안에서부터 피부를 향해 대바늘을 통과시키고 고정하면 된다. 양쪽으로 하나씩 넣어 우측 하복부에 tip 위치하도록 고정했다. 열었던 복부를 복막, 근막, 피하지방층, 피부 순서로 닫아주었다. 수술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다했다. 이제는 환자 스스로 회복하는 것을 기다려야 한다. "Intu(기관 삽관용 튜브)는 안빼고 나갈게요, 중환자실에 Vent(인공호흡기) 준비해달라고 연락하세요." 마취과 교수님은 환자의 마취를 위해 사용되었던 기관내 삽관튜브를 제거하지 않고 퇴실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대량출혈이 있었던 상황이고, 마취가 깨는 과정에서 환자가 몸부림을 친다면 애써 지혈.. 2020. 8. 1.
전공의 일기. 4-14화 [딸깍 딸깍 딸깍, 툭툭툭툭] 환자의 복부를 움켜쥐고 있던 스테플러(봉합용)와 나일론 매듭을 풀었다. 심하게 팽창된 복부로 인해 칼이 살짝 닿기만 해도, 봉합용 나일론은 쉽게 끊어졌다. 피부의 봉합사들을 모두 제거하고 난 뒤, 근막이 드러났다. 수술 후 탈장을 방지하기 위해 단단하게 봉합하기 때문에 쉽게 잘라내기 어려웠다. 시간이 걸려, 근막이 다시 열렸고, 장을 감싸고 있는 복막이 드러났다. 복막을 절개해 나갔다. "석션 준비해. 양쪽에서 둘 다 석션해" 교수님의 지시가 있었고, 나와 당직 전공의는 환자의 양쪽 편에 서서 석션을 준비하였다. 복막의 2/3 이 절개되어 갈 때쯤, 시뻘건 피 덩어리가 배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복강 내 출혈이었다. 환자의 복강을 가득 채우고 있던 혈종은 그 양이 3L가 넘.. 2020. 7. 31.
전공의 일기. 4-13화 "선생님 CT 결과 나왔습니다. 현재 Active bleeding focus(활동성 출혈, 피가 나고 있는 부위)는 찾을 수 없으나, 복강 내 Hematoma(혈종, 피가 굳은 상태의 덩어리)가 크게 확인되고 있고, 위치는 우측 하복부입니다. Angio(혈관조영술)를 시행해 볼 수 있으나. 환자 활력징후가 좋지 않아서 Exploration(탐색적 개복술)하는 게 낫겠다는 판독입니다. 환자 혈압이 sBP(수축기 혈압)가 50까지 떨어져서 Vaso 시작하겠습니다." CT실에서 당직 전공의의 전화가 걸려왔다. 현재 상태가 좋지 않고, 명확하게 출혈 부위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사이 환자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어 다른 종류의 승압제까지 투여를 하고 있었다. 이대로 두었다간 한시.. 2020. 7. 30.
전공의 일기. 4-12화 "보호자분이세요? 여기 병원입니다. 새벽에 전화드려 죄송합니다. 통화가 가능하실까요?" "네, 무슨일이세요?" "환자분의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CT를 찍어봐야 알겠지만, 현재 상태는 복강내 출혈이 의심되는 상황입니다. 혈압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고, 현재는 승압제(혈압을 올리기 위한 약물)를 사용하고 있어요." "네? 아까는 수술이 잘 됐다고 하셨잖아요. 어쩌면 좋아...... 살 수 있어요? 뭘 해야하나요? 살려주세요" "수술이후 활력징후와 혈액검사는 괜찮았습니다. 수술과정에서도 특별히 문제가 될 사항은 없었어요. 출혈인지 아닌지, 출혈이 있다면 어디서 있는건지는 확인해봐야 알겠지만, 수술이나 시술을 해야하는 상황은 분명합니다. 혹시 병원에 계시나요?" "아니요. 아까 수술끝나고 집에 잠깐 와있어요... 2020. 7. 29.
전공의 일기. 4-11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중환자실에 도착했다. 환자가 있는 8번 자리에는 많은 간호사들이 위급상황에 대처하고 있었다. 수혈은 진행 중이었고, 환자의 의식은 있었다. "환자분 지금 어디가 제일 불편하세요? 배가 아프세요?" "으으..." 간신히 내뱉은 환자의 대답을 근거로, 신체진찰을 시작했다. JP catheter의 양은 음압을 걸어두면 바로 차오를 정도로 배액되고 있었고, 색깔도 선혈에 가까웠다. 수술부위를 지지하기 위해 복대가 채워져 있었지만, 배는 풍선처럼 부풀어있었다. 수술 부위인 우측을 중심으로,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고, 통증의 양상이 전체 복부를 포함하는 상태였다. 복부 청진에서는 장음이 들리지 않았고, 환자의 결막은 허옇게 변해있었다. '출혈이다. 이건 틀림없는 복강내 출혈의 징후다.' "피 세개.. 2020. 7. 28.
전공의 일기. 4-10화 "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 책상을 뒤흔드는 진동과 불쾌한 소음으로 눈을 떴다. 수술이 끝나고 환자의 차트를 정리하기 위해 당직실로 향했던 나는 는 환자의 혈액검사 결과가 나오길 기다리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고 말았던 것이다. "네 비뇨의학과 전공의입니다." "선생님 여기 CSICU(순환기 외과계 중환자실)인데요, 혈액검사 결과 노티 드리려 전화드렸어요." "네 우선 불러주시겠어요?" 엎드려서 잠이 든 여파로, 안경알은 기름기가 번져있었고, 시야가 흐렸다. 애를 써서 작은 글씨를 읽으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Hb(헤모글로빈) 7.3, Lactic 2.5, PO2 100, PCO2 30, Na+ 130, K" 5.6이에요." "C-line(중심정맥관, 대량의 수액공급이나, 응급 약물 투여 등.. 2020. 7. 27.
전공의 일기. 4-9화 "환자분 눈 떠 보세요. 수술 끝났어요, 환자분 눈 뜨세요." 환자는 아직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환자가 마취가 된 지 벌써 4시간이 넘게 흐른 상황이었다. 마취과 교수님과 회복실 간호사는 환자의 활력징후를 지속적으로 확인하며, 환자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몇 분이 지났을까? 환자의 마취 상태를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뇌파 장치가 환자의 의식이 회복되고 있는 상황을 알려왔다. "환자분 눈 뜨세요, 수술 끝났습니다. 눈을 뜨셔야 입에 있는 관을 제거해 드릴 수 있어요." 환자는 통증 때문인지 제어가 되지 않는 몸부림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수술대에서의 낙상을 방지하기 위해 환자를 고정하는 체스트 밴드와 니 밴드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몸에 힘 빼시구요. 어서 숨을 크게 쉬세요. 마취가스가.. 2020. 7. 26.
전공의 일기. 4-8화 "똑바로 고정해봐! 자꾸 흘러내리잖아!" "네! 죄송합니다." 수술을 시작한 지 1시간이 흘렀다. 후복막에 고정된 신장은 그 형체를 드러냈다. 검붉고 울퉁불퉁 제멋대로 생긴 우측 신장이 후복막강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었고, 주변 조직은 염증의 여파로, 단단하게 유착되어 있었다. 신장을 박리해 나갔다. 혹여나 종양을 잘못건드려 터지기라도 한다면, 후복막은 물론 복강 내로의 전파도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긴장하고 있었다. 미세한 혈관들을 혈관 클립으로 결찰해 나가며 수술은 너무도 섬세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ABGA 팔로우업 해주세요" 마취과 교수님의 요청으로 환자의 동맥에서 채혈이 진행되었다. 현재까지는 출혈도 없고, 순조로웠다. 혈압은 수축기 100정도 되었고, 심박수도 안정적이었다. "박.. 2020. 7. 24.
전공의 일기. 4-6화 "환자분 제가 설명드린 내용들을 이해하실 수 있겠어요? 더 궁금하신 건 있으실까요?" "없어" "여기 환자분께서 수술에 관한 사항들을 저에게 설명들으셨고, 이해하셨으면 체크해주시고, 성함, 싸인을 해주세요." 1시간이 걸렸다. 환자의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 더 신경써서 설명했고, 최악의 상황까지 설명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사망에 이르는 경우는 없으나, 확률이 제로는 아니라는 부연설명을 추가하긴 했다. 환자와 보호자는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궁금한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긴장 때문일 것이다. 어느덧 수술은 이틀 뒤로 다가왔다. 병실을 나와 복도를 걸었다. 신관과 본관을 연결하는 구름다리의 통유리를 통해 저 멀리 주문진 바다가 들어왔다. 노을이 짙게 깔린 바다는 아름다웠다. '강릉까지 와서.. 2020. 7. 23.
전공의 일기. 4-4화 "환자분 투석실에서 도착하셨습니다." 5분이 지났을까? 환자가 투석실에서 병실로 이동해왔다. 휠체어에 타고 있는 환자의 모습을 보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독기 가득했던 눈은 반쯤 감겨있었고, 투석으로 진이 빠졌는지 영 맥이 없는 모습이었다. 요란한 환자 도착 소식으로 보호자가 깨어났다. "안 힘들었어? 땀은 왜 이렇게 많이 났어. 어쩌면 좋아" 보호자는 나를 본체만체하고는 환자에게 달려 나갔다. 환자는 대꾸할 여력도 없는지 휠체어에서 간신히 일어나 침대로 옮겨갔다. 아침에는 오른쪽으로 누 운상태였지만, 이번에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투석이 많이 힘드셨죠? 첫 투석인데 그래도 잘 이겨내셨어요. 고생하셨습니다." "......" 환자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이제는 정말 지쳤다는 듯 눈을 감았다. "선생님.. 2020. 7. 22.
전공의 일기. 4-3화 매일 오전 교수님의 회진 전 환자를 먼저 찾아 밤사이 불편한 점이 있었는지를 확인하는 pre-rounding을 시행한다. 이 시간은 차트에서는 확인할 수 없는 많은 정보를 얻어낼 수 있는 시간이기에, 소홀히 할 수 없다. 어제 나와의 다툼이 있었던 만성 신장질환 환자는 교수님의 회진 이후 생각을 바꾸어서 투석을 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깔끔한 결정 과정은 아니었다. "잘 주무셨어요? 어젯밤사이 불편한 점은 없으셨어요?" "......" 환자는 오른쪽으로 돌아누운 채 내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았다. 내 마음은 왼쪽으로 돌아누운 상태였기에, 답변을 기다리지 않고 병실을 나섰다. 병실 입구를 나서는데, 화장실 쪽에서 걸어오는 환자의 배우자를 만났다. 밤새 걱정으로 심란해진 얼굴을 깨끗이 씻고 나온 것 같았다. .. 2020. 7.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