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의 일기39 전공의 일기. 5-36 유난히 긴 밤이 지났다. 서울의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에 답답함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늦은 새벽까지 침대를 벗어나 방안을 서성이다가 다시 자리에 눕는 상황이 반복됐다. 새로 맞이한 아침. 강릉에서의 일상은 전과 다름없이 흘러갔지만 나의 하루는 어제의 연속이었다. 지난밤 할아버지의 상태는 어떻게 변했고 가족들은 어떤 선택을 했을지가 너무나 궁금했다. 오전 회진을 마치고 서울로 전화를 걸었다. "형. 어떻게 됐어?" "일단은 어제랑 큰 변화는 없어. 승압제도 그대로 유지 중이고. 아침 CXR(chest X-ray, 흉부 방사선 촬영)에서 effusion(흉막삼출)이 조금 더 늘어났다." "mental은 여전하지?" "쭉 변함없어. Intensive care(중환자 집중치료)를 하는 게.. 2021. 3. 11. 전공의 일기. 5-30 CT에도 이상소견은 보이지 않았고, 수술 후 상당한 시간이 지났지만, 할아버지의 장마비 증상은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가스가 배출되고 소량의 변을 보았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가스의 배출은 장 운동이 돌아오고 있는 신호로 해석하기 때문에 식이를 진행할 수 있다고 판단하게 되지만, 장을 수술한 환자의 경우라면, 복부 X-ray의 호전 상황을 면밀히 확인해 식이 진행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할아버지의 경우에는 복부의 가스가 아직 정상적인 형태로는 보이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점차 힘들어하고 비위관(콧줄)으로 인한 불편감을 상당히 많이 호소하였기 때문에, 적절한 시기에 제거 여부를 결정하고, 식사 진행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중요했다. 정성스럽게 간병을 하던 보호자들도 시간이 .. 2020. 11. 22. 전공의 일기. 5-28 멀리서 할아버지가 수액 걸이대에 의지해 위태롭게 병동을 걷는 모습을 보았다. 간병인의 도움을 받아 한 걸음씩 내딛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짠하게 다가왔다. 두어 발자국 내딛고 가느다란 수액 걸이대에 몸을 지탱하고 쉬길 반복하며, 할아버지는 내가 있는 쪽으로 가까워졌다. '힘이 드셔도 이겨내셔야 해요. 힘내세요.' 할아버지가 나를 발견하면, 운동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며 몸을 숨겼다. 애처롭지만, 과정을 이겨내셔야 했기에 멀리서 응원하는 것에 만족했다. 오후 회진 시작 전 할아버지를 찾았다. 첫 운동에 진이 다 빠졌는지, 할아버지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오늘은 운동을 좀 하셨어요?" "아이고, 말도 마. 이선생이 검사한다고 해서 열심히 했어. 힘들어 죽겠네" "무슨 죽.. 2020. 11. 13. 전공의 일기. 5-27 날이 밝았다. 처치실에서 관찰 중이던 할아버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당직실을 나섰다. 근치적 방광 절제술은 수술 후 환자의 상태가 급속도로 악화될 수 있기 때문에 병동에 별도로 마련된 공간에서 환자를 관찰하게 된다. 주렁주렁 수액이 달린 수액 걸이대와, 할아버지의 심장 상태, 산소 포화도를 확인하기 위한 전극들이 어지럽게 연결되어 있었다. "주무세요? 통증은 조금 나아지셨어요?" "이선생...... 아파...... 아파......" "어디가 아프셔요? 특별하게 더 아픈곳이 있어요?" "그냥 아파...... 다 아파......" "잠깐만 배 좀 만져볼게요" 할아버지의 복대를 풀고, 어제 수술한 부위를 관찰했다. 배꼽 위아래로 길게 절개되었던 수술 상처가 나이론 실로 봉합되어 있는 모습이 기찻길을 연상시켰.. 2020. 11. 11. 전공의 일기. 5-23화 6시간 "오늘이 수술 날입니다. 환자분께서 보호자분들께 설명을 해드리길 원하셔서 이렇게 모시게 되었습니다."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이제야 병원에 오게 되었습니다. 오늘 아버지 수술은 잘되겠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 역시 환자분께서 무사히 수술을 받으시고 건강하게 퇴원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께서 도통 말씀을 안 하셔서 그러는데...... 지금 저희 아버지 상태가 정확히 어떤가요?" "네? 환자분께서 말씀을 안하셨던가요?" "아버지께서는 별거 아니라고, 걱정 말라고만 하셨지 지금 상태에 대해서는 말씀을 해 주신 게 없습니다. 저희도 답답했지만 서로 생계가 바쁘다 보니 신경을 쓰질 못했습니다." "환자분께서는 아드님과의 여행을 다녀오고 현재 상태를 분명히 말씀드렸다고 하시던데요? 환자분의 .. 2020. 10. 19. 전공의 일기. 5-22화 수술날 아침. 어김없이 날이 밝았고, 드디어 수술이 예정된 날 아침이 되었다. 할아버지를 괴롭혔던 방광의 육종이 이제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유착으로 인해 쉽지 않은 수술이 될 것임을 알고 있던 터라, 아침부터 모두들 긴장한 모습이었다. 할아버지는 밤새 잠을 못 이루셨는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제 좀 주무셨어요? 표정을 보니까 하나도 못 주무신것 같은데요?" "에이 이선생. 내가 암수술 한 두번 받아보나? 잘 잤어 아주. 컨디션 최고야 최고" "딱 보니까 피곤한 얼굴인데요 뭐. 하나도 못주무신것 같구먼......" "아니야 잘 잤어. 이따가 아들놈 들하고, 마누라하고 병원에 온다는데 이선생님 만나서 얘기 좀 해줄 수 있을까?" "네, 당연히 해야죠. 제가 어떤 얘기를 해드리면 될까요?" "수술 별거 아니라.. 2020. 10. 14. 전공의 일기. 5-21 후회 수술을 결심하고 난 뒤 진행되었던 검사 결과가 취합되었다. 다행인 것은 할아버지의 전신상태가 수술을 견디기에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심장 초음파는 할아버지의 심기능이 충분히 안정적임을 보여주었고, 폐 기능 검사 또한, 수술을 진행하기에 문제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할아버지의 방광에 자리 잡고 있던 육종의 크기가 더욱 커졌다는 것이고, 간에서 새롭게 생겨난 병변들이 관찰되었다는 것이다. 아직 조직검사를 시행하기에는 그 크기가 작아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전이를 확신할만한 근거는 뚜렷이 없었지만, 정황상 육종의 간 전이를 의심하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다. 수술을 위한 준비가 끝났고, 수술이 내일로 다가왔다. "할아버지, 저 왔어요" "이선생 왔어?" "왜 이렇게 기운이 없으세요? 요즘 걱정이 많이 .. 2020. 10. 13. 전공의 일기. 5-19화 자식이 뭔지 숨찬 하루를 보냈다.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일을 하다 보니, 저녁 일과를 마치고 탈진상태가 되었다. 퇴근을 준비하고 전공의실을 나서던 순간,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가운을 입지 않고 병실로 향했다. 의사로서 환자를 만나는 것이 아닌, 친한 할아버지의 병문안으로써의 의미였다. "할아버지, 저 왔어요" "아고, 이선생 왔어? 옷을 이렇게 입으니까 못알아보겠네. 가운이 더 잘 어울려 이선생은" "퇴근하려던 길에 들렀어요. 저녁 식사는 하셨어요?" "병원은 밥을 제때제때 주니까 좋아. 당연히 먹었지." "잘하셨어요. 어떻게 다시 입원하시게 된 거에요?" "아들놈들 성화에 못 이겨서지 뭐. 지 엄마 힘들게 하지 말고 수술받으라고......" "아드님들이 수술을 받으라고 하셨어요?" "큰 아들놈이 여행을 가자고 해서 .. 2020. 10. 8. 전공의 일기. 5-18 익숙한 목소리 할아버지가 퇴원을 하고 한동안 절망감에 빠져나오지 못했다. 삶이 왜 이러는 것인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을 두고 열심히 살아야 하는게 맞는가를 고민했다. 할아버지와 나는 별 인연이랄 것도 없는 환자와 의사로 만났지만, 짧은 순간동안 서로를 이해하는 관계가 되었다. 할아버지의 퇴원은 내게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의사로서 환자를 포기하는 것일 수 있었고, 환자로서 본인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는 자기주도적 의사결정일 수 있었다. 어느 것이 더 옳은 것인지 윤리적 잣대를 드리울 수 없겠지만, 질병의 회복을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할아버지에게 치료를 강요하는 일은 옳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삶의 끝을 나는 어렴풋이 예측할 수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할아버지가 본인이 선택한 결정을 통해, 아름다.. 2020. 10. 7. 전공의 일기. 5-17 퇴원 할아버지는 내게 쪽지를 남기고 퇴원하셨다. '이선생. 항상 고마워. 밥이라도 한 끼 샀으면 해서 전화번호를 남겨달라 했는데, 연락처가 남겨져 있지 않아 대신 내 연락처를 적었어. 여행도 다니고 잘 지낼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언제 꼭 한번 연락줘. 못보고가서 아쉽네.' 항상 활기가 넘치던 활아버지의 쪽지에는 그 전과는 다른 담담함이 배어있었다. 잘 나오지 않는 검은색 볼펜을 눌러쓰신 흔적이 남아있는 쪽지를 다시 고이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병동을 벗어나 당직실로 향하는 길에 어제 할아버지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본인이 마주한 인생의 끝자락에서 할아버지는 쉽지 않은 결정을 했을 것이다. 끝까지 설득을 했어야 했나하는 후회가 들었지만, 금새 부질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사고를 접었다. 자신의 마지막이 언제쯤이 될 것.. 2020. 10. 5. 전공의 일기. 5-14화 또 다시 혈뇨. "환자분 입실하셨습니다." 환자가 수술실로 들어왔다. 소변줄을 통해 시뻘건 혈뇨가 배액되고 있었다. 선홍색의 분명한 출혈이었다. 아마도 조직검사를 시행한 변연부에서 혈액의 누출이 발생하였을 것이다. 인턴이 환자를 수술용 침대로 옮겼다.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짙은 근심이 드리워져 있었다. 환의 하의가 벗겨지고, 수술을 위한 자세를 취했다. "또 피가 나네요. 최대한 빨리 끝내보겠습니다. 전에 해보셔서 아시죠?" "그려. 왜 자꾸 피가 나는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돼. 전에도 이선생이 수술해주고 피 안났으니까 이번에도 잘 부탁해. 나좀 살려줘. 죽겠어 진짜." "제가 최대한 통증없이 빠르게 해볼게요. 어제 수술한 부위 주변에 혈관이 파열되면서 피가 나는 것 같아요. 혹시 오전에 배에 힘을 많이 주셨어요?" "대변.. 2020. 9. 25. 전공의 일기. 5-12화 Urine clear [카톡] 저녁 10시경 카카오톡 알림이 울렸다. 보통 이시간에 들리는 알람은 내일 스케쥴 배정표인 경우가 많았다. 동기에게 내일 수술 일정에 대해 부탁을 해 놓은 것이 있었기에 서둘러 메세지를 확인했다. '일정표가 왔구만. 어디보자..... donor nephrectomy(공여 신장 적출술) 배정이네......' 아쉬운 마음이 컸다. 중절모 할아버지의 수술장에 들어가고 싶었기에 부탁을 해 두었지만, 스케쥴을 짜는 입장에서는 원하는 수술에 배정을 해준다는것이 매우 곤욕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정을 확인하고 있는 중에 동기로 부터 메세지가 왔다. 원하는 수술에 배정해주고 싶었는데 수술 일정이 빡빡해 조절이 어려워, 그 수술에는 넣어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해한다고 답장을 남기고 잠자리에 들었다.. 2020. 9. 22. 이전 1 2 3 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