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의 일기.63 전공의 일기. 5-37 이상한 꿈을 꾸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짙은 어둠속에 나 홀로 떠다니고 있었고, 형체를 알 수 없는 파도가 계속해서 나를 덮쳐왔다. 도움을 요청하려 입을 열면 어둠이 밀려들어와 소리를 낼 수 없었다. 벗어나려해도 끝이 없이 계속해서 깊은 어둠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이 기괴한 상황에서 탈출하기위해 몸부림치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일어나보니 땀으로 베개가 흠뻑 젖어있었다. 할아버지를 뵙고난 뒤 마음이 뒤숭숭한 탓인지 평소에 꾸지 않던 꿈을 꾸었다며, 이상한 일이라 생각하고는 다시 잠을 청했다. 얼마가 지났을까? 언제나처럼 불쾌한 진동에 눈을 떴다. 출근준비를 위한 알람이 울린 것이었다. 아내와 아기들이 모두 곤히 잠에들어있던 터라 조심스럽게 알람을 끄고는 방을 나섰다. 이제 겨울에 접어든 새벽 집안의 공기는.. 2021. 3. 22. 전공의 일기. 5-36 유난히 긴 밤이 지났다. 서울의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에 답답함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늦은 새벽까지 침대를 벗어나 방안을 서성이다가 다시 자리에 눕는 상황이 반복됐다. 새로 맞이한 아침. 강릉에서의 일상은 전과 다름없이 흘러갔지만 나의 하루는 어제의 연속이었다. 지난밤 할아버지의 상태는 어떻게 변했고 가족들은 어떤 선택을 했을지가 너무나 궁금했다. 오전 회진을 마치고 서울로 전화를 걸었다. "형. 어떻게 됐어?" "일단은 어제랑 큰 변화는 없어. 승압제도 그대로 유지 중이고. 아침 CXR(chest X-ray, 흉부 방사선 촬영)에서 effusion(흉막삼출)이 조금 더 늘어났다." "mental은 여전하지?" "쭉 변함없어. Intensive care(중환자 집중치료)를 하는 게.. 2021. 3. 11. 전공의 일기. 5-35 강릉에서의 파견 생활이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찬란한 가을 단풍을 가슴으로 맞으며 강릉으로 향한 지 벌써 4주 차에 접어들었고, 선선하게 기분 좋던 바람은 앙칼지게 차가워졌다. 비교적 무난했던 하루를 마무리하며 차트 정리를 시작했다. 저녁 바람이 서늘하게 느껴져 당직실 창문을 닫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전화가 울렸다. 서울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서 겨울 한기가 느껴졌다. "어 난데, 야 또 BP(혈압) 떨어진다. 미치겠네" "왜? 무슨일인데?" "아침에 살짝 열이 올랐다가 금방 떨어져서 걱정 안 하고 있었는데 방금 전에 39도까지 열이 나더니 지금 sBP 70대야. 환장하겠다 이거, 뭐가 문젠지 모르겠네." "anti(항생제)는 계속 쓰고 있던 거 아니었어? 왜 열이나?.. 2021. 1. 31. 전공의 일기. 5-34 "오늘은 특별한 이벤트 없었어? 괜찮은 거야?" "뭐 일단 승압제는 끊었으니까 특별한 이벤트가 있는 것이겠지?" "오 끊었어? 바이탈(Vital sign) 괜찮아? Vent(ventilator, 인공호흡기)는? "아직. 오늘 승압제 끊었는데, 그럭저럭 잘 견뎌내고 계셔. 문제는 effusion(pleural effusion, 흉막삼출)이 아직도 조절이 안 되는 상태라 아직 Vent는 못 뗄 것 같아" "오늘이 4일째인가? 이제 Cx.(culture, 배양검사) 나올 때 되지 않았어?" "이제 나올 때가 되었는데, 아직 미확정 상태라......" "궁금하네...... 인공호흡기만 떼면 이제 올라오실 수 있겠는데?" "Septic condition(패혈증 상태)에 들어가면서 계속 sedative(진정제) 걸.. 2021. 1. 31. 전공의 일기. 5-33 서울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난 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전화로 전해 들은 할아버지의 상태는 분명 패혈증 쇼크였다. 할아버지의 연세와 기저 질환을 고려하면 상당히 빠른 시간 안에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었다. '퇴원 전에 시행한 혈액검사도 이상소견은 없었고, 입원 중에 발열도 없었는데...... 도대체 이유가 뭘까? 패혈증 상태임은 분명한데 원인이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내가 놓치고 있던게 있었을까? 분명히 다 확인을 했는데...... 이제 병원에서 보지 말자고 약속해놓고 왜 다시 오신 건지......' 내적 불안이 심해졌다.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지만, 의사 생활을 하면서 이런 불안감이 엄습했을 때 결과가 좋았던 적이 거의 없었다. 불안한 마음에 일과가 끝나고 서울의 동기에게 다시.. 2021. 1. 23. 전공의 일기. 5-32 계절이 바뀌어 세상에 가을이 내렸다. 높은 하늘,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날, 나는 강릉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매 석 달마다 찾아오는 파견을 앞둔 때면,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짧아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새로운 환경에서 환자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뒤섞여 오묘한 기분이 든다. 한 달의 파견 기간 동안 필요한 준비를 마치고 병원을 떠났다. 한강을 좌측으로 하고 강릉으로 향하는 길은 가을의 색이 담뿍 담겨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남들은 즐거운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올 시간이었기에 강릉으로 내려가는 도로는 한적했다. 오후 다섯시경 서울을 출발해 강릉에 도착했을 때, 시계는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전 달 파견 전공의와 서둘러 재원환자에 대한 인계를 마친 뒤 근무를 교대했다. "어디 보자.. 2021. 1. 17. 전공의 일기. 5-31 오랜 시간 동안 마음의 짐으로 남았던 할아버지가 드디어 퇴원을 맞이하게 되었다. 큰 수술을 한두 번 받아보냐며 큰소리치시던 자신만만한 할아버지의 모습과 수술 후 아프다며 투정을 부리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묘하게 오버랩되며 미소를 짓게 했다. 이런 여유가 생긴 것은 할아버지의 수술 후 경과가 좋아서일 것이다. 그토록 마음 졸이게 했던 수술 후 장 마비 증상도 씻은 듯 사라졌고, 특별한 이상 증상 없이 할아버지는 오늘을 맞이했다. 약속했던 오전 회진시간이 다가오고, 차트를 다시한번 꼼꼼하게 챙겼다. 아직 할아버지의 몸에는 정체를 확인하지 못한 작은 덩어리가 자리 잡고 있다. 조직검사 결과는 예상한 것처럼 방광 내 육종으로 판명되었다. 방광의 육종은 그 자체가 희귀할 뿐 아니라, 상당한 속도로 성장하고 전이가.. 2020. 12. 14. 전공의 일기. 5-30 CT에도 이상소견은 보이지 않았고, 수술 후 상당한 시간이 지났지만, 할아버지의 장마비 증상은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가스가 배출되고 소량의 변을 보았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가스의 배출은 장 운동이 돌아오고 있는 신호로 해석하기 때문에 식이를 진행할 수 있다고 판단하게 되지만, 장을 수술한 환자의 경우라면, 복부 X-ray의 호전 상황을 면밀히 확인해 식이 진행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할아버지의 경우에는 복부의 가스가 아직 정상적인 형태로는 보이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점차 힘들어하고 비위관(콧줄)으로 인한 불편감을 상당히 많이 호소하였기 때문에, 적절한 시기에 제거 여부를 결정하고, 식사 진행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중요했다. 정성스럽게 간병을 하던 보호자들도 시간이 .. 2020. 11. 22. 전공의 일기. 5-29 할아버지의 상태는 수술 후 4일이 지나도록 호전이 보이지 않았다. 가스가 배출되지 않아 배는 남산만 하게 부풀어 올랐고, 부푼 장이 횡격막을 압박해 숨을 쉬기도 어려운 상황이 지속되었다. 매일 콧줄을 통해 배액 되는 체액의 양은 여전히 500cc를 넘어선 상황이었기 때문에 지금 당장 콧줄을 제거하기도 어려웠다. 가스 제거 효과가 있는 약물과, 장 운동을 도와주는 보조 약물을 사용했지만 이마저 효과가 없었다. 할아버지는 지쳐갔고, 오랜 금식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할아버지, 오늘은 CT를 좀 찍어 볼까해요. 장마비가 지속되고 있고, 장이 부풀어서 횡격막을 압박하는 상황이라, 숨쉬기도 어려우실 거예요. CT를 찍어서 기계적 장폐색이 아닌지 확인을 해보겠습니다." "이선생 이거 언제나 좋아지는거야? 물.. 2020. 11. 15. 전공의 일기. 5-28 멀리서 할아버지가 수액 걸이대에 의지해 위태롭게 병동을 걷는 모습을 보았다. 간병인의 도움을 받아 한 걸음씩 내딛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짠하게 다가왔다. 두어 발자국 내딛고 가느다란 수액 걸이대에 몸을 지탱하고 쉬길 반복하며, 할아버지는 내가 있는 쪽으로 가까워졌다. '힘이 드셔도 이겨내셔야 해요. 힘내세요.' 할아버지가 나를 발견하면, 운동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며 몸을 숨겼다. 애처롭지만, 과정을 이겨내셔야 했기에 멀리서 응원하는 것에 만족했다. 오후 회진 시작 전 할아버지를 찾았다. 첫 운동에 진이 다 빠졌는지, 할아버지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오늘은 운동을 좀 하셨어요?" "아이고, 말도 마. 이선생이 검사한다고 해서 열심히 했어. 힘들어 죽겠네" "무슨 죽.. 2020. 11. 13. 전공의 일기. 5-27 날이 밝았다. 처치실에서 관찰 중이던 할아버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당직실을 나섰다. 근치적 방광 절제술은 수술 후 환자의 상태가 급속도로 악화될 수 있기 때문에 병동에 별도로 마련된 공간에서 환자를 관찰하게 된다. 주렁주렁 수액이 달린 수액 걸이대와, 할아버지의 심장 상태, 산소 포화도를 확인하기 위한 전극들이 어지럽게 연결되어 있었다. "주무세요? 통증은 조금 나아지셨어요?" "이선생...... 아파...... 아파......" "어디가 아프셔요? 특별하게 더 아픈곳이 있어요?" "그냥 아파...... 다 아파......" "잠깐만 배 좀 만져볼게요" 할아버지의 복대를 풀고, 어제 수술한 부위를 관찰했다. 배꼽 위아래로 길게 절개되었던 수술 상처가 나이론 실로 봉합되어 있는 모습이 기찻길을 연상시켰.. 2020. 11. 11. 전공의 일기. 5-26 병실에서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도 수고하셨어요~" 장장 7시간에 걸친 수술이 끝났다. 할아버지의 요루에서는 맑은 소변이 거침없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유착이 심한터라 골반강 내에서 방광을 분리하기까지 상당한 수고를 들여야 했으나, 요루를 통해 흘러나오는 소변을 바라보며, 수술이 무사히 잘 끝났음에 감사했다. 복강내 유착을 박리한 부위에서는 다행히 출혈의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이리 저리 출혈의 여부를 살피며, 지혈을 시행한 뒤 복강 내 장기를 정리하고, 근막을 단단히 닫아 주었다. 행여나 근막이 느슨하게 닫히게 된다면, 할아버지 복부의 큰 절개창을 통해 복강내 장기의 탈출(탈장)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신경써야 했다. 마지막으로 피부봉합을 끝내곤 마취기계에 의존해 숨을 이어가던 할아버지를 깨우는 과정.. 2020. 11. 2. 이전 1 2 3 4 ··· 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