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의 일기. (63) 썸네일형 리스트형 전공의 일기. 5-37 이상한 꿈을 꾸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짙은 어둠속에 나 홀로 떠다니고 있었고, 형체를 알 수 없는 파도가 계속해서 나를 덮쳐왔다. 도움을 요청하려 입을 열면 어둠이 밀려들어와 소리를 낼 수 없었다. 벗어나려해도 끝이 없이 계속해서 깊은 어둠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이 기괴한 상황에서 탈출하기위해 몸부림치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일어나보니 땀으로 베개가 흠뻑 젖어있었다. 할아버지를 뵙고난 뒤 마음이 뒤숭숭한 탓인지 평소에 꾸지 않던 꿈을 꾸었다며, 이상한 일이라 생각하고는 다시 잠을 청했다. 얼마가 지났을까? 언제나처럼 불쾌한 진동에 눈을 떴다. 출근준비를 위한 알람이 울린 것이었다. 아내와 아기들이 모두 곤히 잠에들어있던 터라 조심스럽게 알람을 끄고는 방을 나섰다. 이제 겨울에 접어든 새벽 집안의 공기는.. 전공의 일기. 5-36 유난히 긴 밤이 지났다. 서울의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에 답답함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늦은 새벽까지 침대를 벗어나 방안을 서성이다가 다시 자리에 눕는 상황이 반복됐다. 새로 맞이한 아침. 강릉에서의 일상은 전과 다름없이 흘러갔지만 나의 하루는 어제의 연속이었다. 지난밤 할아버지의 상태는 어떻게 변했고 가족들은 어떤 선택을 했을지가 너무나 궁금했다. 오전 회진을 마치고 서울로 전화를 걸었다. "형. 어떻게 됐어?" "일단은 어제랑 큰 변화는 없어. 승압제도 그대로 유지 중이고. 아침 CXR(chest X-ray, 흉부 방사선 촬영)에서 effusion(흉막삼출)이 조금 더 늘어났다." "mental은 여전하지?" "쭉 변함없어. Intensive care(중환자 집중치료)를 하는 게.. 전공의 일기. 5-35 강릉에서의 파견 생활이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찬란한 가을 단풍을 가슴으로 맞으며 강릉으로 향한 지 벌써 4주 차에 접어들었고, 선선하게 기분 좋던 바람은 앙칼지게 차가워졌다. 비교적 무난했던 하루를 마무리하며 차트 정리를 시작했다. 저녁 바람이 서늘하게 느껴져 당직실 창문을 닫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전화가 울렸다. 서울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서 겨울 한기가 느껴졌다. "어 난데, 야 또 BP(혈압) 떨어진다. 미치겠네" "왜? 무슨일인데?" "아침에 살짝 열이 올랐다가 금방 떨어져서 걱정 안 하고 있었는데 방금 전에 39도까지 열이 나더니 지금 sBP 70대야. 환장하겠다 이거, 뭐가 문젠지 모르겠네." "anti(항생제)는 계속 쓰고 있던 거 아니었어? 왜 열이나?.. 전공의 일기. 5-34 "오늘은 특별한 이벤트 없었어? 괜찮은 거야?" "뭐 일단 승압제는 끊었으니까 특별한 이벤트가 있는 것이겠지?" "오 끊었어? 바이탈(Vital sign) 괜찮아? Vent(ventilator, 인공호흡기)는? "아직. 오늘 승압제 끊었는데, 그럭저럭 잘 견뎌내고 계셔. 문제는 effusion(pleural effusion, 흉막삼출)이 아직도 조절이 안 되는 상태라 아직 Vent는 못 뗄 것 같아" "오늘이 4일째인가? 이제 Cx.(culture, 배양검사) 나올 때 되지 않았어?" "이제 나올 때가 되었는데, 아직 미확정 상태라......" "궁금하네...... 인공호흡기만 떼면 이제 올라오실 수 있겠는데?" "Septic condition(패혈증 상태)에 들어가면서 계속 sedative(진정제) 걸.. 전공의 일기. 5-33 서울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난 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전화로 전해 들은 할아버지의 상태는 분명 패혈증 쇼크였다. 할아버지의 연세와 기저 질환을 고려하면 상당히 빠른 시간 안에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었다. '퇴원 전에 시행한 혈액검사도 이상소견은 없었고, 입원 중에 발열도 없었는데...... 도대체 이유가 뭘까? 패혈증 상태임은 분명한데 원인이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내가 놓치고 있던게 있었을까? 분명히 다 확인을 했는데...... 이제 병원에서 보지 말자고 약속해놓고 왜 다시 오신 건지......' 내적 불안이 심해졌다.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지만, 의사 생활을 하면서 이런 불안감이 엄습했을 때 결과가 좋았던 적이 거의 없었다. 불안한 마음에 일과가 끝나고 서울의 동기에게 다시.. 전공의 일기. 5-32 계절이 바뀌어 세상에 가을이 내렸다. 높은 하늘,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날, 나는 강릉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매 석 달마다 찾아오는 파견을 앞둔 때면,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짧아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새로운 환경에서 환자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뒤섞여 오묘한 기분이 든다. 한 달의 파견 기간 동안 필요한 준비를 마치고 병원을 떠났다. 한강을 좌측으로 하고 강릉으로 향하는 길은 가을의 색이 담뿍 담겨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남들은 즐거운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올 시간이었기에 강릉으로 내려가는 도로는 한적했다. 오후 다섯시경 서울을 출발해 강릉에 도착했을 때, 시계는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전 달 파견 전공의와 서둘러 재원환자에 대한 인계를 마친 뒤 근무를 교대했다. "어디 보자.. 전공의 일기. 5-31 오랜 시간 동안 마음의 짐으로 남았던 할아버지가 드디어 퇴원을 맞이하게 되었다. 큰 수술을 한두 번 받아보냐며 큰소리치시던 자신만만한 할아버지의 모습과 수술 후 아프다며 투정을 부리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묘하게 오버랩되며 미소를 짓게 했다. 이런 여유가 생긴 것은 할아버지의 수술 후 경과가 좋아서일 것이다. 그토록 마음 졸이게 했던 수술 후 장 마비 증상도 씻은 듯 사라졌고, 특별한 이상 증상 없이 할아버지는 오늘을 맞이했다. 약속했던 오전 회진시간이 다가오고, 차트를 다시한번 꼼꼼하게 챙겼다. 아직 할아버지의 몸에는 정체를 확인하지 못한 작은 덩어리가 자리 잡고 있다. 조직검사 결과는 예상한 것처럼 방광 내 육종으로 판명되었다. 방광의 육종은 그 자체가 희귀할 뿐 아니라, 상당한 속도로 성장하고 전이가.. 전공의 일기. 5-30 CT에도 이상소견은 보이지 않았고, 수술 후 상당한 시간이 지났지만, 할아버지의 장마비 증상은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가스가 배출되고 소량의 변을 보았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가스의 배출은 장 운동이 돌아오고 있는 신호로 해석하기 때문에 식이를 진행할 수 있다고 판단하게 되지만, 장을 수술한 환자의 경우라면, 복부 X-ray의 호전 상황을 면밀히 확인해 식이 진행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할아버지의 경우에는 복부의 가스가 아직 정상적인 형태로는 보이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점차 힘들어하고 비위관(콧줄)으로 인한 불편감을 상당히 많이 호소하였기 때문에, 적절한 시기에 제거 여부를 결정하고, 식사 진행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중요했다. 정성스럽게 간병을 하던 보호자들도 시간이 .. 이전 1 2 3 4 ··· 8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