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바뀌어 세상에 가을이 내렸다.
높은 하늘,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날, 나는 강릉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매 석 달마다 찾아오는 파견을 앞둔 때면,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짧아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새로운 환경에서 환자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뒤섞여 오묘한 기분이 든다.
한 달의 파견 기간 동안 필요한 준비를 마치고 병원을 떠났다. 한강을 좌측으로 하고 강릉으로 향하는 길은 가을의 색이 담뿍 담겨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남들은 즐거운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올 시간이었기에 강릉으로 내려가는 도로는 한적했다.
오후 다섯시경 서울을 출발해 강릉에 도착했을 때, 시계는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전 달 파견 전공의와 서둘러 재원환자에 대한 인계를 마친 뒤 근무를 교대했다.
"어디 보자...... 다들 수술 환자구나. 특별히 문제가 될 만한 환자는 없어 보이네. 다행이다."
환자를 파악한 뒤 병동으로 향했다. 당직실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병동에 도착해서는 내일 오전에 있을 회진을 대비하여 환자 상태를 파악했다.
한 시간가량이 흘렀고, 주변은 어느새 어둑해졌다. 멀리 보이는 동해바다에 고깃배들의 불빛이 아름답게 일렁였다.
짐을 풀기위해 기숙사로 향했다. 병원 본관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오래된 건물이 기숙사이다. 한 달을 묵을 채비를 한터라 짐이 상당히 많았다. 낑낑거리며 짐을 들고, 방문을 열면 습기가 가득한 매캐한 공기가 나를 반긴다.
'다시 왔네. 매번 올 때마다, 이 냄새는 적응이 안된다니까......'
푸념을 내뱉으며, 강릉에서의 첫 날을 마무리 했다.
강릉에서의 파견생활은 그리 편하지 않다. 본원에서의 시스템과 상당 부분 차이가 있기 때문에 기계로 대신할 일들을 손수 챙겨야 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환자 수는 본원의 1/4 수준이지만, 들이는 수고는 거의 비슷하다.
강릉에서 만나는 환자들은 주로 감염과 연관된 경우가 많다. 방광염, 전립선염, 신우신염 등 다양한 염증 케이스를 접할 수 있으며, 이들의 중증도는 생각보다 높다. 이들 상당수는 의료접근성이 좋지 못한 곳에 거처를 두고 있기 때문에, 감염이 발생한 초기에 병원을 방문하기 어려워 병을 키우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강릉에서의 생활이 몸에 익어갈 때 쯤, 서울에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어, 난데 그 할아버지 응급실로 오셨네?"
"그 할아버지가 누군데? 한 두분도 아니고. 그 할아버지라고 하면 어떻게 알아."
"그 할아버지. Sarcoma(육종)"
"엥? 얼마전에 퇴원 잘하셨는데 왜?"
"일단 열이 나서 ER(응급실)로 오셨는데, Lactic(젖산) 3.1이고, BP(혈압)도 떨어지고 아마 Septic condition(패혈증 상태)으로 가는 중인 것 같아."
"마지막 Cx(fever study, 균 배양검사)에서 특별한게 자라진 않았는데?"
"일단은 Anti(항균제) 쓰고, 입원해서 봐야지, U/O(소변량)도 줄고 안 좋다."
"아고...... 집에 가신다고 좋아하셨는데 우짜냐......"
"입원장은 낸 거지?"
"응 입원하셔야지. 너랑 각별한 것 같아서 전화했어. 끊는다"
"떙큐, 복귀하면 찾아가 봐야겠다"
"그때까지 버텨 주실지 모르겠다. 기분이 싸한데......"
"잘 좀 봐줘. 부탁임"
"그래 알았어. 오면 보자. 특별한 게 있으면 알려줄게"
"오키, 수고"
서울에서 걸려온 전화는 얼마 전 퇴원하신 중절모 할아버지의 상태가 좋지 않음을 알려주는 전화였다. 밝은 얼굴로 퇴원하셨던 할아버지가 감염이 발생하여 응급실로 내원하셨다는 소식에 걱정스러웠다.
'마지막 날 Lab(혈액검사)도 괜찮았고, 배양검사도 특별한 게 없었는데 왜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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