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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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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의 일기. 5-29 할아버지의 상태는 수술 후 4일이 지나도록 호전이 보이지 않았다. 가스가 배출되지 않아 배는 남산만 하게 부풀어 올랐고, 부푼 장이 횡격막을 압박해 숨을 쉬기도 어려운 상황이 지속되었다. 매일 콧줄을 통해 배액 되는 체액의 양은 여전히 500cc를 넘어선 상황이었기 때문에 지금 당장 콧줄을 제거하기도 어려웠다. 가스 제거 효과가 있는 약물과, 장 운동을 도와주는 보조 약물을 사용했지만 이마저 효과가 없었다. 할아버지는 지쳐갔고, 오랜 금식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할아버지, 오늘은 CT를 좀 찍어 볼까해요. 장마비가 지속되고 있고, 장이 부풀어서 횡격막을 압박하는 상황이라, 숨쉬기도 어려우실 거예요. CT를 찍어서 기계적 장폐색이 아닌지 확인을 해보겠습니다." "이선생 이거 언제나 좋아지는거야? 물..
전공의 일기. 5-28 멀리서 할아버지가 수액 걸이대에 의지해 위태롭게 병동을 걷는 모습을 보았다. 간병인의 도움을 받아 한 걸음씩 내딛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짠하게 다가왔다. 두어 발자국 내딛고 가느다란 수액 걸이대에 몸을 지탱하고 쉬길 반복하며, 할아버지는 내가 있는 쪽으로 가까워졌다. '힘이 드셔도 이겨내셔야 해요. 힘내세요.' 할아버지가 나를 발견하면, 운동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며 몸을 숨겼다. 애처롭지만, 과정을 이겨내셔야 했기에 멀리서 응원하는 것에 만족했다. 오후 회진 시작 전 할아버지를 찾았다. 첫 운동에 진이 다 빠졌는지, 할아버지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오늘은 운동을 좀 하셨어요?" "아이고, 말도 마. 이선생이 검사한다고 해서 열심히 했어. 힘들어 죽겠네" "무슨 죽..
전공의 일기. 5-27 날이 밝았다. 처치실에서 관찰 중이던 할아버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당직실을 나섰다. 근치적 방광 절제술은 수술 후 환자의 상태가 급속도로 악화될 수 있기 때문에 병동에 별도로 마련된 공간에서 환자를 관찰하게 된다. 주렁주렁 수액이 달린 수액 걸이대와, 할아버지의 심장 상태, 산소 포화도를 확인하기 위한 전극들이 어지럽게 연결되어 있었다. "주무세요? 통증은 조금 나아지셨어요?" "이선생...... 아파...... 아파......" "어디가 아프셔요? 특별하게 더 아픈곳이 있어요?" "그냥 아파...... 다 아파......" "잠깐만 배 좀 만져볼게요" 할아버지의 복대를 풀고, 어제 수술한 부위를 관찰했다. 배꼽 위아래로 길게 절개되었던 수술 상처가 나이론 실로 봉합되어 있는 모습이 기찻길을 연상시켰..
전공의 일기. 5-26 병실에서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도 수고하셨어요~" 장장 7시간에 걸친 수술이 끝났다. 할아버지의 요루에서는 맑은 소변이 거침없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유착이 심한터라 골반강 내에서 방광을 분리하기까지 상당한 수고를 들여야 했으나, 요루를 통해 흘러나오는 소변을 바라보며, 수술이 무사히 잘 끝났음에 감사했다. 복강내 유착을 박리한 부위에서는 다행히 출혈의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이리 저리 출혈의 여부를 살피며, 지혈을 시행한 뒤 복강 내 장기를 정리하고, 근막을 단단히 닫아 주었다. 행여나 근막이 느슨하게 닫히게 된다면, 할아버지 복부의 큰 절개창을 통해 복강내 장기의 탈출(탈장)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신경써야 했다. 마지막으로 피부봉합을 끝내곤 마취기계에 의존해 숨을 이어가던 할아버지를 깨우는 과정..
전공의 일기. 5-25화 유착 수술은 험난했다. 전립선 암으로 이미 한차례 수술을 시행했었고, 잔여 암으로 인해 방사선 치료를 받았기 때문에 골반강 내의 장기들이 구분이 지어지지 않을 정도로 유착되어 있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손가락을 이용하여 주변의 장기와 박리를 진행할 수 있지만, 할아버지의 경우에는 전기 소작기를 이용해 경험과 감으로 장기를 박리해 나아가는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예상보다 험난한 상황에 의료진은 예민해져 있었다. "석션(Suction, 음압을 이용하여 체액을 흡인하는 기구) 좀 똑바로 해!" "네 알겠습니다." "스무스로 여기 잡아" "네 교수님" 경험많은 교수님의 리드로 조직을 절제하기 시작한 지 1시간이 지났을까? 환자의 골반강에서 방광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의 방광에 자리잡은 육종(S..
전공의 일기. 5-24화 개복 수술대에 누워있는 할아버지를 둘러싸고 많은 의료진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비뇨의학과에서 시행하는 수술 중 가장 위험하고, 어려운 수술이기에 할아버지의 안전을 위한 준비가 철저히 이루어져야 했다. 주기적으로 들려오는 마취기계의 소리가 차가운 수술방의 공기를 더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마취과 의사는 할어버지의 좌측 경정맥에 중심정맥관을 삽입하였고, 우측 팔의 요골동맥에 동맥압 측정을 위한 A-line(Arterior line)을 잡았다. 긴 수술을 견디기 위한 안전장치들이 준비되었고, 나는 할아버지의 옆에 진갈색 소독약을 들고 섰다. 조명에 의해 창백하리만큼 하얗게 비춰지는 할아버지의 복부를 진갈색 소독약으로 섬세히 닦아냈다. "오늘 절개는 long-mid line(정중절개)으로 할겁니다. 명치부터 회음..
전공의 일기. 5-23화 6시간 "오늘이 수술 날입니다. 환자분께서 보호자분들께 설명을 해드리길 원하셔서 이렇게 모시게 되었습니다."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이제야 병원에 오게 되었습니다. 오늘 아버지 수술은 잘되겠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 역시 환자분께서 무사히 수술을 받으시고 건강하게 퇴원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께서 도통 말씀을 안 하셔서 그러는데...... 지금 저희 아버지 상태가 정확히 어떤가요?" "네? 환자분께서 말씀을 안하셨던가요?" "아버지께서는 별거 아니라고, 걱정 말라고만 하셨지 지금 상태에 대해서는 말씀을 해 주신 게 없습니다. 저희도 답답했지만 서로 생계가 바쁘다 보니 신경을 쓰질 못했습니다." "환자분께서는 아드님과의 여행을 다녀오고 현재 상태를 분명히 말씀드렸다고 하시던데요? 환자분의 ..
전공의 일기. 5-22화 수술날 아침. 어김없이 날이 밝았고, 드디어 수술이 예정된 날 아침이 되었다. 할아버지를 괴롭혔던 방광의 육종이 이제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유착으로 인해 쉽지 않은 수술이 될 것임을 알고 있던 터라, 아침부터 모두들 긴장한 모습이었다. 할아버지는 밤새 잠을 못 이루셨는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제 좀 주무셨어요? 표정을 보니까 하나도 못 주무신것 같은데요?" "에이 이선생. 내가 암수술 한 두번 받아보나? 잘 잤어 아주. 컨디션 최고야 최고" "딱 보니까 피곤한 얼굴인데요 뭐. 하나도 못주무신것 같구먼......" "아니야 잘 잤어. 이따가 아들놈 들하고, 마누라하고 병원에 온다는데 이선생님 만나서 얘기 좀 해줄 수 있을까?" "네, 당연히 해야죠. 제가 어떤 얘기를 해드리면 될까요?" "수술 별거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