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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의 일기./나의 중절모 할아버지

전공의 일기. 5-37

by ASLAN_URO 2021. 3. 22.

이상한 꿈을 꾸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짙은 어둠속에 나 홀로 떠다니고 있었고, 형체를 알 수 없는 파도가 계속해서 나를 덮쳐왔다. 도움을 요청하려 입을 열면 어둠이 밀려들어와 소리를 낼 수 없었다. 벗어나려해도 끝이 없이 계속해서 깊은 어둠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이 기괴한 상황에서 탈출하기위해 몸부림치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일어나보니 땀으로 베개가 흠뻑 젖어있었다. 할아버지를 뵙고난 뒤 마음이 뒤숭숭한 탓인지 평소에 꾸지 않던 꿈을 꾸었다며, 이상한 일이라 생각하고는 다시 잠을 청했다. 

 

얼마가 지났을까? 언제나처럼 불쾌한 진동에 눈을 떴다. 출근준비를 위한 알람이 울린 것이었다. 아내와 아기들이 모두 곤히 잠에들어있던 터라 조심스럽게 알람을 끄고는 방을 나섰다. 

 

이제 겨울에 접어든 새벽 집안의 공기는 차가웠다. 정신을 차리려 물을 한잔 따라들고는 밤새 있었던 일들을 파악하기위해 메신저를 열었다. 

 

 

 

[오전 4시 34분 H 교수님 환자분 000 님 사망하셨습니다.]

 

 

 

가슴이 철렁했다. 

 

'며칠은 더 뵐 수 있을 줄 알았는데......가셨구나.'

 

먹먹한 가슴을 부여잡고 병원에 도착해서 할아버지의 병실을 찾았다. 

 

내가 병실에 도착했을 때에는 새롭게 깔려진 새하얀 시트가 할아버지의 흔적을 이미 지워버린 뒤였다. 

 

예상했고 준비했던 상황이지만, 기적을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기에 실망이 컸다.

 

할아버지가 누워 계셨던 침대 곁에 서서 무겁고 비통한 마음을 다잡기위해 기를 썼다. 

 

눈물이 눈앞을 어지럽혔다.

 

하얀 시트에 반사되는 햇볕이 이별의 공간에서 찬란하게 대조를 이루어 나의 슬픔을 더했다.

 

https://pixabay.com/ko/photos/

 

'가셨네요. 인사도 없이. 안녕히 가세요. 이제는 아프지 마시구요. 푹 쉬세요. 그래도 오늘 저는 좀 보고가시지...... 너무하신거 아니에요? 저는 할아버지 걱정 많이 했는데 서운하네요. 어제라도 얼굴 보여주셨으니까 용서해드릴게요. 그건 고마워요. 할아버지. 지금와서 하는 얘기지만, 중절모 진짜 잘 어울려요. 머리 가운데 벗겨진거 가리려고 쓰신거 아는데요. 모자 벗었을 때 보다는 중절모 쓰셨을 때가 훨씬 멋있어요. 앞으로도 계속 챙겨서 쓰세요. 그리고 이제는 엄살 좀 그만부리세요. 점잖은 얼굴로 아프다고 살살하라고 하실때면 제가 얼마나 밍구스러웠는지 아세요? 나름대로 실력있다고 자부하는데 시술 할 때 마다 아프다고 하시니까 제가 자존심이 좀 상했어요. 그것도 그렇고 주변사람들이 걱정해요.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엄살부리지 마세요. 전화번호 알려드리지 않은건 죄송해요. 업무규정상 어쩔 수 없었어요. 전에 적어주신 쪽지는 아직도 잘 보관하고 있어요. 이런 상황이 올까봐 보관하고 있던건 아닌데 할아버지 생각날 때마다 열어볼게요. 저 할아버지 장례식에는 안가려구요. 제가 죄송스러워져서 웃고있는 할아버지 사진을 다시 볼 용기가 없어요. 나중에 뵙게되면 그때 맛있는 밥 얻어먹을게요. 다시한번 당부드리는데요. 아프지 마세요. 저 이제 병실에서 나갑니다. 이제 진짜 안녕히 가세요.'

 

할아버지가 떠나셨다. 텅 빈 할아버지의 병실처럼 하루가 공허했다.

 

 

 

늦은 저녁 집으로 돌아와 할아버지의 부고를 아내에게 전했다. 그동안 할아버지와의 일들을 아내에게도 얘기했던터라 아내도 나와 같은 마음으로 할아버지를 걱정하고 있었다. 

 

"자기야, 할아버지 장례식에 가봐야 하는거 아니야? 자기한테 특별한 할아버지셨잖아."

 

"안갈래......그냥 이렇게 보내드릴래."

 

"진짜 안가봐도 괜찮겠어?"

 

"응. 안갈래 여보. 이미 인사드렸어. 나중에라도 뵙게되면 꼭 내가 밥 한번 얻어먹겠다고. 안녕히 가시라고......푹 쉬시고 중절모는 꼭 쓰고 다니시라고......보고싶지만 참겠다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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