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에서의 파견 생활이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찬란한 가을 단풍을 가슴으로 맞으며 강릉으로 향한 지 벌써 4주 차에 접어들었고, 선선하게 기분 좋던 바람은 앙칼지게 차가워졌다.
비교적 무난했던 하루를 마무리하며 차트 정리를 시작했다. 저녁 바람이 서늘하게 느껴져 당직실 창문을 닫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전화가 울렸다. 서울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서 겨울 한기가 느껴졌다.
"어 난데, 야 또 BP(혈압) 떨어진다. 미치겠네"
"왜? 무슨일인데?"
"아침에 살짝 열이 올랐다가 금방 떨어져서 걱정 안 하고 있었는데 방금 전에 39도까지 열이 나더니 지금 sBP 70대야. 환장하겠다 이거, 뭐가 문젠지 모르겠네."
"anti(항생제)는 계속 쓰고 있던 거 아니었어? 왜 열이나?"
"그걸 알면 내가 전화했겠냐. 일단 급한불은 꺼야 하니까 NS(normal saline, 생리식염수) drip 하고 line(수액을 투 여하기 위한 혈관 확보) 다시 잡고 있어. drip으로 안되면 다시 norpin 써야겠다."
"lab(혈액검사 결과)은 괜찮았어? 왜 갑자기 그래. Chest PCD(흉강 배액관) malfunction 아니야? PCD function은 괜찮아?"
"CXR(chest X-ray)은 어제랑 큰 차이 없어. pleural effusion(흉막삼출)도 늘거나 하지 않았고, 지금 irrigation 해보려고 하는 중이야. 오전까지도 drain 비슷했거든. 아마 다른 문제인 것 같은데. 돌겠네."
"진정하고 잘 좀 찾아봐. 어딘가는 문제가 있겠지."
"야 일단 끊어봐."
"알았어. 끊어"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던 하루의 이유를 알았다. 중절모 할아버지가 다시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동안 잘 버텨내셔서 이제는 회복기에 접어들었다고 생각을 했던 참이기에 충격과 불안감이 더욱 컸다. 일반병실로 올라오신 뒤 얼마가 지나지 않았던 터라 다들 긴장하고 환자 상태를 모니터링하고 있었겠지만, 이런 상황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을 것이다.
'어디가 문제지...... 그사이에 새로운 균이 자라기라도 한 건가? 다시 중환자실 가셔야 할 것 같은데......'
불안한 마음에 당직실을 서성였다. 의자와 책상, 침대가 어지럽게 얽혀있는 당직실이 지금 나 마음 같았다. 미로같이 구불한 당직실을 빙글빙글 돌며, 불안정한 내 자신을 달랬다.
앉았다 일어섰다 서성이 다를 반복했다. 시계는 어느덧 저녁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지 궁금해서 미쳐버리겠네...... 괜찮을까? ICU(중환자실)로 다시 가신 건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마음에 전화기를 들었다. 서울의 당직 전공의에게 전화를 걸려던 참에 동기 형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형 어떻게 됐어?"
"무슨 전화를 이렇게 빨리 받냐. NS(normal saline) 3L까지 drip 했는데 BP(혈압)이 안 잡히더라. 결국에는 C-line(중심정맥관) 다시 넣고 norpin(승압제의 한 종류) 다시 시작했어. 마지막 lab에서 lactic(젖산) 3점대가 넘는데 또 septic shock이지 뭐"
"norpin에는 반응이 있어? 지금은 얼마야?"
"지금은 0.08 mcg에서 sBP(수축기 혈압) 90대 유지하고 있는데, 아직 열도 계속 나고 점점 안 좋아질 것 같아"
"anti(항생제)는? 바꾼 거야?"
"일단 내과 하고 상의해서 Pip/Taz (piperacillin/tazobactam, 항균제)로 변경했어. 내과에서는 pneumonia(폐렴)로 보고 있더라고."
"CXR(흉부 방사선) 특별한 문제없었다면서?"
"Pleural effusion(흉막삼출)이 오래 지속되기도 했고, both lung field infiltration도 증가한 게 지금으로서는 pneumonia가 제일 의심이 된다고 써보자고 하네"
"효과가 있어야 할 텐데...... ICU(중환자실)은 다시 안 내려가도 될까? 지금 얘기 들어봐선 가야 될 것 같은데?"
"안 그래도 알아보고 있는데. 가족들끼리 의견이 갈려서......"
"이건 또 무슨 얘기야? 의견이 갈린다니?"
"할아버지가 지난번에 퇴원하시면서 이 정도 했으면 다했으니까 이제 죽게 되면 그냥 내버려두라고 하셨다네."
"아니 그건 그거고. 지금은 septic condition이고 회복이 가능하잖아? 근데 안 가겠다고 그래?"
"인공호흡기 처치를 하게 되면 소생 혹은 사망 시까지 제거가 어렵다고 설명을 드렸거든. 지난번엔 상황이 급박해서 가족들도 생각을 못하고 있었던 거지. 이번에 할아버지 중환자실 가고 인공호흡기 치료하는걸 할머니가 보시더니 할아버지 그만 괴롭히라고 했다고 하셨다네. 두 아들은 그래도 해볼 수 있을 때까지는 하자고 하시고."
"난처하구먼...... 오늘은 그럼 그냥 처치실에서 보기로 한 거야?"
"그래야지. 오늘 새벽이라도 돌아가실 수 있다고 설명드리고 빨리 결정해달라고 말씀드렸는데. 아직까지 결정을 못하셨나 봐."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 상황이면 중환자실 가시는 게 낫겠는데......"
"연락 기다려보자."
"그려 고생했어. 퇴근하세요"
"뭔 퇴근이야. 환자가 저런데. 무튼 변동사항 있으면 연락 줄게"
"고맙습니다. 당직 있으니까 집에 가서 좀 쉬다와. 이번 달 힘들었다면서"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쪽이나 주무시지요"
"예 알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행님"
'전공의 일기. > 나의 중절모 할아버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공의 일기. 5-37 (0) | 2021.03.22 |
---|---|
전공의 일기. 5-36 (0) | 2021.03.11 |
전공의 일기. 5-34 (0) | 2021.01.31 |
전공의 일기. 5-33 (0) | 2021.01.23 |
전공의 일기. 5-32 (0) | 2021.0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