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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의 일기.16

전공의 일기. 5-37 이상한 꿈을 꾸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짙은 어둠속에 나 홀로 떠다니고 있었고, 형체를 알 수 없는 파도가 계속해서 나를 덮쳐왔다. 도움을 요청하려 입을 열면 어둠이 밀려들어와 소리를 낼 수 없었다. 벗어나려해도 끝이 없이 계속해서 깊은 어둠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이 기괴한 상황에서 탈출하기위해 몸부림치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일어나보니 땀으로 베개가 흠뻑 젖어있었다. 할아버지를 뵙고난 뒤 마음이 뒤숭숭한 탓인지 평소에 꾸지 않던 꿈을 꾸었다며, 이상한 일이라 생각하고는 다시 잠을 청했다. 얼마가 지났을까? 언제나처럼 불쾌한 진동에 눈을 떴다. 출근준비를 위한 알람이 울린 것이었다. 아내와 아기들이 모두 곤히 잠에들어있던 터라 조심스럽게 알람을 끄고는 방을 나섰다. 이제 겨울에 접어든 새벽 집안의 공기는.. 2021. 3. 22.
전공의 일기. 5-35 강릉에서의 파견 생활이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찬란한 가을 단풍을 가슴으로 맞으며 강릉으로 향한 지 벌써 4주 차에 접어들었고, 선선하게 기분 좋던 바람은 앙칼지게 차가워졌다. 비교적 무난했던 하루를 마무리하며 차트 정리를 시작했다. 저녁 바람이 서늘하게 느껴져 당직실 창문을 닫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전화가 울렸다. 서울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서 겨울 한기가 느껴졌다. "어 난데, 야 또 BP(혈압) 떨어진다. 미치겠네" "왜? 무슨일인데?" "아침에 살짝 열이 올랐다가 금방 떨어져서 걱정 안 하고 있었는데 방금 전에 39도까지 열이 나더니 지금 sBP 70대야. 환장하겠다 이거, 뭐가 문젠지 모르겠네." "anti(항생제)는 계속 쓰고 있던 거 아니었어? 왜 열이나?.. 2021. 1. 31.
전공의 일기. 5-34 "오늘은 특별한 이벤트 없었어? 괜찮은 거야?" "뭐 일단 승압제는 끊었으니까 특별한 이벤트가 있는 것이겠지?" "오 끊었어? 바이탈(Vital sign) 괜찮아? Vent(ventilator, 인공호흡기)는? "아직. 오늘 승압제 끊었는데, 그럭저럭 잘 견뎌내고 계셔. 문제는 effusion(pleural effusion, 흉막삼출)이 아직도 조절이 안 되는 상태라 아직 Vent는 못 뗄 것 같아" "오늘이 4일째인가? 이제 Cx.(culture, 배양검사) 나올 때 되지 않았어?" "이제 나올 때가 되었는데, 아직 미확정 상태라......" "궁금하네...... 인공호흡기만 떼면 이제 올라오실 수 있겠는데?" "Septic condition(패혈증 상태)에 들어가면서 계속 sedative(진정제) 걸.. 2021. 1. 31.
전공의 일기. 5-33 서울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난 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전화로 전해 들은 할아버지의 상태는 분명 패혈증 쇼크였다. 할아버지의 연세와 기저 질환을 고려하면 상당히 빠른 시간 안에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었다. '퇴원 전에 시행한 혈액검사도 이상소견은 없었고, 입원 중에 발열도 없었는데...... 도대체 이유가 뭘까? 패혈증 상태임은 분명한데 원인이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내가 놓치고 있던게 있었을까? 분명히 다 확인을 했는데...... 이제 병원에서 보지 말자고 약속해놓고 왜 다시 오신 건지......' 내적 불안이 심해졌다.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지만, 의사 생활을 하면서 이런 불안감이 엄습했을 때 결과가 좋았던 적이 거의 없었다. 불안한 마음에 일과가 끝나고 서울의 동기에게 다시.. 2021. 1. 23.
전공의 일기. 5-32 계절이 바뀌어 세상에 가을이 내렸다. 높은 하늘,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날, 나는 강릉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매 석 달마다 찾아오는 파견을 앞둔 때면,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짧아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새로운 환경에서 환자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뒤섞여 오묘한 기분이 든다. 한 달의 파견 기간 동안 필요한 준비를 마치고 병원을 떠났다. 한강을 좌측으로 하고 강릉으로 향하는 길은 가을의 색이 담뿍 담겨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남들은 즐거운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올 시간이었기에 강릉으로 내려가는 도로는 한적했다. 오후 다섯시경 서울을 출발해 강릉에 도착했을 때, 시계는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전 달 파견 전공의와 서둘러 재원환자에 대한 인계를 마친 뒤 근무를 교대했다. "어디 보자.. 2021. 1. 17.
전공의 일기. 5-31 오랜 시간 동안 마음의 짐으로 남았던 할아버지가 드디어 퇴원을 맞이하게 되었다. 큰 수술을 한두 번 받아보냐며 큰소리치시던 자신만만한 할아버지의 모습과 수술 후 아프다며 투정을 부리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묘하게 오버랩되며 미소를 짓게 했다. 이런 여유가 생긴 것은 할아버지의 수술 후 경과가 좋아서일 것이다. 그토록 마음 졸이게 했던 수술 후 장 마비 증상도 씻은 듯 사라졌고, 특별한 이상 증상 없이 할아버지는 오늘을 맞이했다. 약속했던 오전 회진시간이 다가오고, 차트를 다시한번 꼼꼼하게 챙겼다. 아직 할아버지의 몸에는 정체를 확인하지 못한 작은 덩어리가 자리 잡고 있다. 조직검사 결과는 예상한 것처럼 방광 내 육종으로 판명되었다. 방광의 육종은 그 자체가 희귀할 뿐 아니라, 상당한 속도로 성장하고 전이가.. 2020. 12. 14.
전공의 일기. 5-29 할아버지의 상태는 수술 후 4일이 지나도록 호전이 보이지 않았다. 가스가 배출되지 않아 배는 남산만 하게 부풀어 올랐고, 부푼 장이 횡격막을 압박해 숨을 쉬기도 어려운 상황이 지속되었다. 매일 콧줄을 통해 배액 되는 체액의 양은 여전히 500cc를 넘어선 상황이었기 때문에 지금 당장 콧줄을 제거하기도 어려웠다. 가스 제거 효과가 있는 약물과, 장 운동을 도와주는 보조 약물을 사용했지만 이마저 효과가 없었다. 할아버지는 지쳐갔고, 오랜 금식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할아버지, 오늘은 CT를 좀 찍어 볼까해요. 장마비가 지속되고 있고, 장이 부풀어서 횡격막을 압박하는 상황이라, 숨쉬기도 어려우실 거예요. CT를 찍어서 기계적 장폐색이 아닌지 확인을 해보겠습니다." "이선생 이거 언제나 좋아지는거야? 물.. 2020. 11. 15.
전공의 일기. 5-26 병실에서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도 수고하셨어요~" 장장 7시간에 걸친 수술이 끝났다. 할아버지의 요루에서는 맑은 소변이 거침없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유착이 심한터라 골반강 내에서 방광을 분리하기까지 상당한 수고를 들여야 했으나, 요루를 통해 흘러나오는 소변을 바라보며, 수술이 무사히 잘 끝났음에 감사했다. 복강내 유착을 박리한 부위에서는 다행히 출혈의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이리 저리 출혈의 여부를 살피며, 지혈을 시행한 뒤 복강 내 장기를 정리하고, 근막을 단단히 닫아 주었다. 행여나 근막이 느슨하게 닫히게 된다면, 할아버지 복부의 큰 절개창을 통해 복강내 장기의 탈출(탈장)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신경써야 했다. 마지막으로 피부봉합을 끝내곤 마취기계에 의존해 숨을 이어가던 할아버지를 깨우는 과정.. 2020. 11. 2.
전공의 일기. 5-25화 유착 수술은 험난했다. 전립선 암으로 이미 한차례 수술을 시행했었고, 잔여 암으로 인해 방사선 치료를 받았기 때문에 골반강 내의 장기들이 구분이 지어지지 않을 정도로 유착되어 있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손가락을 이용하여 주변의 장기와 박리를 진행할 수 있지만, 할아버지의 경우에는 전기 소작기를 이용해 경험과 감으로 장기를 박리해 나아가는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예상보다 험난한 상황에 의료진은 예민해져 있었다. "석션(Suction, 음압을 이용하여 체액을 흡인하는 기구) 좀 똑바로 해!" "네 알겠습니다." "스무스로 여기 잡아" "네 교수님" 경험많은 교수님의 리드로 조직을 절제하기 시작한 지 1시간이 지났을까? 환자의 골반강에서 방광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의 방광에 자리잡은 육종(S.. 2020. 10. 25.
전공의 일기. 5-24화 개복 수술대에 누워있는 할아버지를 둘러싸고 많은 의료진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비뇨의학과에서 시행하는 수술 중 가장 위험하고, 어려운 수술이기에 할아버지의 안전을 위한 준비가 철저히 이루어져야 했다. 주기적으로 들려오는 마취기계의 소리가 차가운 수술방의 공기를 더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마취과 의사는 할어버지의 좌측 경정맥에 중심정맥관을 삽입하였고, 우측 팔의 요골동맥에 동맥압 측정을 위한 A-line(Arterior line)을 잡았다. 긴 수술을 견디기 위한 안전장치들이 준비되었고, 나는 할아버지의 옆에 진갈색 소독약을 들고 섰다. 조명에 의해 창백하리만큼 하얗게 비춰지는 할아버지의 복부를 진갈색 소독약으로 섬세히 닦아냈다. "오늘 절개는 long-mid line(정중절개)으로 할겁니다. 명치부터 회음.. 2020. 10. 21.
전공의 일기. 하늘파란 강릉에서 글을 통해 제 소중한 경험을 나누고자 작성하기 시작한 전공의 일기. 하늘파란 강릉에서가 출간되었습니다. 115페이지의 짧은 에세이지만, 원고 작성부터, 퇴고, 표지 디자인까지 모두 제 손으로 마무리한 책입니다. 첫 번째 출간이기에 부끄러운 점이 많지만, 준비하는 과정 하나하나가 굉장히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출간 과정에서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종이책 구매하기] [전자책 구매하기] 2020. 10. 21.
전공의 일기. 5-20 우려 본격적인 수술을 위한 준비가 시작됐다. 할아버지의 암덩이가 지난 3개월간 얼마나 얌전히 있었을지 평가를 해야 했다. CT를 시행하여 전이 여부를 평가했고, 뒤 이어 신장기능은 얼마나 보존된 상태인지 핵의학 검사가 이어졌다. 마취를 위한 심장기능 평가와 호흡기 검사가 함께 이루어졌고, 검사 결과들이 하나씩 취합되었다. 쉼 없이 진행되는 검사일정에서 할아버지가 지쳐가는 것이 보였다. "할아버지, 검사는 잘 받으셨어요? 오늘따라 기운이 없어보이시네요." "이선생 왔어? 하루 종일 검사실 불려 다니면서 온갖 검사 다 한다고 지쳤어 아주." "고생하셨어요. 수술 준비는 이제 얼추 마무리된 것 같아요. 아직 수술 일정은 안 잡힌 것 같은데, 교수님이 혹시 날짜를 지정해 주시던가요?" "다음 주쯤 검사 결과보고 날짜.. 2020. 10.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