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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의 일기./나의 중절모 할아버지

전공의 일기. 5-18 익숙한 목소리

by ASLAN_URO 2020. 10. 7.

 

 할아버지가 퇴원을 하고 한동안 절망감에 빠져나오지 못했다. 삶이 왜 이러는 것인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을 두고 열심히 살아야 하는게 맞는가를 고민했다. 할아버지와 나는 별 인연이랄 것도 없는 환자와 의사로 만났지만, 짧은 순간동안 서로를 이해하는 관계가 되었다.

 

 할아버지의 퇴원은 내게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의사로서 환자를 포기하는 것일 수 있었고, 환자로서 본인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는 자기주도적 의사결정일 수 있었다. 어느 것이 더 옳은 것인지 윤리적 잣대를 드리울 수 없겠지만, 질병의 회복을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할아버지에게 치료를 강요하는 일은 옳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삶의 끝을 나는 어렴풋이 예측할 수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할아버지가 본인이 선택한 결정을 통해,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실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 뿐이었다. 

 3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러, 할아버지의 존재는 잊혀져갔다. 나의 일상은 평소와 다름없이 흘러갔고, 매일 환자들을 위로하고, 질병과 싸우는 시간을 보냈다. 아직 보잘 것 없는 전공의라 부족함에 혼이 나기도하고, 최선과 최고를 두고 고민하기는 시간이 이어졌다. 

 

"이선생!"

 

병동 복도를 지나다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 할아버지!? 이게 어찌된 일이에요? 괜찮으셨어요?"

 

"그려, 여행도 다니고 참 재밌게 살았어. 이선생, 전화는 왜 한 통을 안해. 쪽지를 못받았는가?"

 

"쪽지는 받았어요! 괜찮으셨어요? 혈뇨는 안나왔구요?"

 

"쪽지 받았으면 전화 좀 하지그랬어, 이선생이 밥먹는거 부담스러워 할까봐 우리 마누라 김치 좀 주려고 했는데 연락이 없으니 줄 수가 있었야지"

 

"죄송해요, 바빠서 그랬어요. 표정은 훨씬 좋아지셨는데요? 그동안 살도 조금 찌신 것 같고, 얼굴도 뽀얗고"

 

"다 늙어서 얼굴 뽀야면 뭐햐. 소변줄 뽑고 목욕탕에 실컷 댕겨서 그래. 애기들은 잘 있고?"

 

"그럼요. 다 잘 있죠. 그런데 병원에는 어쩐일이세요?"

 

"아...... 말하자면 길어, 나중에 말해 줄테니까 어서 가서 일봐. 오후에 시간되면 나좀 잠깐 보고. 알았지?"

 

"오후에 퇴근전에 한번 찾아갈께요. 보호자분 와 계세요?"

 

"아녀, 다들 출근하고, 마누라는 집에 있고 그렇지 뭐."

 

"알겠습니다. 이따가 뵙겠습니다"

 

 할아버지의 얼굴은 밝았다. 병원에서 다시 만나지 않기를 희망했던 할아버지였지만, 다시 뵙고 난 뒤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무슨일인지 모르겠지만, 보고 싶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