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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의 일기./하늘파란 강릉에서

전공의 일기. 4-16화

by ASLAN_URO 2020. 8. 2.

 폭풍 같은 새벽이 지나 새로운 아침이 시작됐다. 날은 흐렸고, 내 마음을 대변하듯 비가 쏟아질 것 같은 짙은 아침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오전 회진을 준비했다. 환자가 좋지 않은 날은 몸도, 마음도 무거웠다. 어제 죽음을 목전에 두고 출혈과 싸움을 벌였던 환자의 병실에 들어섰다. 수술 후, 하루정도 중환자실에서 경과를 관찰한 뒤 일반 병실로 옮기기로 한 상황이었기에 환자의 자리는 아직 비워두지 않고 있었다. 수술 후 환자를 맞이하기 위해 새롭게 깔아 둔 시트가 새하얗게 그리고 주름 한 점 없이 깔려있었고, 환자의 회복을 돕기 위해 보호자가 준비한 것으로 보이는 식품들이 사물함 앞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그 환자의 침대 앞에서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하고 있을 때, 병실의 담당 간호사가 말을 건넸다. 

"선생님 환자 분 오늘 병실에 몇시 쯤 올라오세요?"

"차트 안봐요? 환자 상태를 보고 말씀하세요. 나를 놀리는 겁니까?"

 분명한 내 잘못이다. 병실 간호사는 오늘 환자가 병실에 올라올 것이라 알고 있었기에 환자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내게서 정보가 필요했을 뿐이다. 나는 복잡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애꿎은 담당 간호사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환자가 일반 병실로 올라오지 못하는 중한 상황이라는 얘기를 했으면 끝났을 텐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간호사의 얼굴은 당황스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몸을 돌려 병실을 나왔다.

 복잡한 마음을 달래려 병원 밖으로 나왔다. 병원 모퉁이의 외진곳에 흡연구역으로 향했다. 생각은 복잡하고, 기분은 좋지 않고, 의욕도 사라지는 답답한 순간에 내가 즐겨 찾는 공간이었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멘솔 향 그득한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댕겼다. 꽉 막힌 마음을 뚫어내려 연기를 깊이 빨아 당겼다. 일과 중에는 담배 냄새 때문에 평소에는 흡연을 하지 않지만, 오늘은 이것마저 없다면 견디기 힘들 것 같았다. 

'왜 그랬을까...... 감정섞지 않고 차분히 얘기하면 됐을 것을......'

후회하며 다시 병동으로 향했다. 오전 시간이라 다들 바쁜 모습이었다. 나는 담당 간호사를 찾았다. 간호사 스테이션 바로 맞은편에서 환자들에게 약을 나눠주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평소에는 환자들에게 친절하기로 소문난 간호사였지만, 오늘은 차가워 보였다. 내 실수로 인한 영향은 아닐까 걱정하며 말을 건넸다.

"죄송해요. 제가 말이 심했습니다. 환자는 어제 수술하고 출혈이 생겨서 오늘 새벽에 응급수술했어요. 지금 상태가 좋지 않아 Vent(인공호흡기) weaning(인공호흡기 치료의 종결) 하지 못한 상태로, 당분간은 ICU(중환자실)에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상태 호전되어서 일반 병실로 올릴 수 있게 되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환자 파악을 안 한 제 잘못도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차가운 우리 둘의 대화는 끝났고, 교수님이 병동에 도착하셨다. 

"어제 수술 환자는 현재 Vent 유지 중으로, 오늘 오전 Hb(혈색소) 7.0입니다. 어제 수술하면서 RBC(적혈구) 5팩 수혈했고, 오늘 오전 FFP(동결 혈장) 3개, PC(혈소판) 8개 수혈 추가로 진행했습니다. PLT(혈소판)은 5만 정도 확인되었습니다."

"수혈 추가로 진행해. 바이탈(Vital sign)은?"

"승압제는 여전히 최고 농도로 사용 중에 있고, sBP(수축기 혈압) 70, mBP(평균 혈압) 55 정도입니다. K+(potassium) level이 7점대로 상승되어 있습니다. 오늘 정규 투석이나, CRRT(continuous renal replacement therapy, 지속적 신대체요법, 정규 투석 시행이 어렵거나, 환자의 상태가 좋지 않을 경우, 침상 옆에서 시행하는 투석의 종류) 시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신장내과와 상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의식은? 아직도 재우나?"

"네 교수님 아직은 sedation(진정)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되어 유지 중입니다. JP 양은 어제 수술 이후 총 400cc 정도 drain(배액) 되었습니다. 오후에도 lab(혈액검사) 시행 예정으로, 결과 확인하며 조절하겠습니다."

"보호자는?"

"중환자 대기실에 계시는 것을 오전에 확인했는데, 지금은 어디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위험 요소들을 설명하고, 환자 상태가 악화될 수 있음을 설명드려. 혈압도 낮았고, 전신 상태로 보면 깨어난다 해도, 예후가 좋지는 않을 것 같다. 중환자실부터 가보자"

"네, 교수님."

분명 아침이었지만, 햇 빛 한점 없는 유리 복도를 지나, 중환자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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