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143

전공의 일기. 5-9화 안도감 불이 꺼진 검사실에 들어섰다. 이미 다른 환자가 검사용 침대에 누워 방광 내시경 검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독된 내시경 기구가 놓이고, 환자의 회음부를 소독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검사가 많네요" "어서오세요, 선생님. 여기 환자분 준비 시작하겠습니다" "네 부탁드립니다." 스테이션에 앉아 검사를 받게 될 환자의 의무기록을 확인했다. 산부인과 환자로 난소와 자궁에 생긴 종양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기로 되어있는 환자였다. 여성의 경우 좁은 골반강(pelvic cavity) 내에 자궁과 난소, 방광이 조밀하게 모여있기 때문에 여성 기관에서 발생한 문제가 방광을 침범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때문에 수술 전 CT나 MRI에서 확인이 되지 않는 점막의 표재성 변성이나, 작을 종양을 발생 유.. 2020. 9. 19.
막국수 혈기 왕성하던 20대 초반, 먹어도 먹어도 배고팠던 때, 친구들과 빈 주머니 털어가며 맛집을 찾아다닌 적 있었다. 서로 하나씩 주변 맛집을 찾아 추천하면 여섯 명이 모여 우르르 몰려가 메뉴판을 눈으로 흘기며, 주머니 사정에 맞춰 최대한 푸짐한 음식을 주문했고, 적당히 근사한 음식들이 눈 앞에 펼쳐지면, 음식에 코를 박고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던 기억이 있다. 우리 모임의 가장 키가 큰 녀석이 군대를 갈 때 였다. 이미 모임의 몇은 국방부 시계나 주야장천 바라보며 전역날을 기다리는 군인 아저씨가 되어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완전한 모임의 모양새를 갖추기는 힘들었지만, 가는 놈 배라도 불려서 보내자라는 마음으로 급하게 모이기로 했었다. "얌마 끌려가기 전에 뭐 먹고 싶냐?" "야, 다른 게 뭔 필요야. 편의점 가.. 2020. 9. 9.
전공의 일기. 5-8화 재회 짙은 공포와 통증, 긴장으로 가득했던 수술실에 평안이 찾아들었다. 시술이 무사히 끝나고 난 뒤, 수술 과정을 기록하는 기록지 작성을 위해, 방사선 차폐벽이 설치된 스테이션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사이 인턴은 환자를 이송용 침대로 옮긴 뒤 회복실로 퇴실을 준비하고 있었다. "인턴 쌤, 지금 Urine color(소변색)은 어때요?" "선생님! clear 합니다." "좋습니다. 환자분은 회복실로 나가셨다가, 응급실로 가실예정이에요. 회복실 선생님께 안내부탁드립니다" "넵 알겠습니다." [드르르륵] 수술실의 자동문이 열리고, 이송 침대에 누운 환자가 수술실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선생. 이제 다시는 보지말자고! 허허허" "네~ 저도 그렇습니다! 일단 응급실로 가셔서 오늘 밤새 소변색이 괜찮은지 확인하고 내일.. 2020. 9. 9.
PDA 부터 Android 까지. PDA가 뭔 줄 알아? 현대를 살아가는 나에게 가장 중요한 물건을 꼽으라면, 단연 '스마트폰'이다. 지금은 휴대폰=스마트폰의 개념이 대중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지만, 내가 군생활을 시작한 2006년만 해도 휴대폰과 노트북 비스무리한 것을 주머니에 들어갈 만한 크기의 장치로 구현한다는 것은 정말 혁신적이었다. 당시에는 PDA(personal digital assistant)라고 불리던 소형 개인용 컴퓨터 장치가 부유한 사람들 혹은 IT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 IT기기에 관심을 쏟는 일명 Early adopter들 사이에서 사용되고 있었지만, 그 용도가 매우 제한적이었고 시스템 자체가 매우 느려 활용도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2007년 삼성은 일명 '블랙잭' 폰을 출시한다. 이 휴대폰은 Windows mo.. 2020. 9. 7.
전공의 일기. 5-7화 소작술 [트드득득 트드드드] 혈종이 부숴지는 소리와 함께, 검붉은 혈액이 Toomey syringe(투미 주사기)를 통해 배출되었다. 혈종의 색은 이미 형성된 지 꽤나 긴 시간이 흐른것으로 보였다. 주사기로 흡인된 혈종을 배수구로 흘려 보내고, 주사기에 생리식염수를 가득 채웠다. 주사기를 경성내시경 sheath(내시경이 통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일종의 싸개)에 결착하고 주사기를 통해 생리식염수를 다시 방광에 채워넣었다. "환자 분, 괜찮으세요?" "아퍼, 아프니까 빨리 끝내. 말 걸지말어! 참고 있으니까!" "네. 조금만 더 힘내세요!" "아우, 빨리혀!" 환자의 통증은 시술 시간에 비례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환자의 인내력이 바닥나기 때문에 서둘러 시술을 이어갔다. [트드드드득 트드드득] 첫 번째 배액이 끝.. 2020. 9. 6.
전공의 일기. 5-6화 방광내시경 방광 내시경은 크게 두가지로 구분된다. 단단한 경성 내시경과, 유연한 연성 내시경. 연성 내시경은 흔히 접할 수 있는 위, 대장 내시경과 유사하지만, 총 길이가 조금 더 짧고, 두께가 얇다. 연성 내시경은 검사자가 내시경의 원위부(distal, 카메라 렌즈 끝)을 조작하여 굴곡을 조절 할 수 있기 때문에 방광의 거의 대부분을 관찰 할 수 있고, 통증이 경성 내시경보다는 적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다른 기구와 결착하여 방광내에서 행해지는 내시경적 시술을 하는데는 제한이 있다. 연성 내시경으로 시행 할 수 있는 시술에는 방광 내 변성조직에 대한 조직검사 및 작은 출혈 부위에 대한 지혈, 5mm 미만의 이물질 제거등이 있다. 경성 내시경의 경우에는 이름 그대로 단단한 구조로 이루어진 쇠 파이프이고, 직경은.. 2020. 9. 3.
일상이 사라졌다. 일상이 소중하다고 느껴지는 때는, 일상이 사라진 순간일 것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예정된 시간에, 그곳에서, 너무나 당연하게 흘러갔던 일상이 사라졌다. 기약없이, 크고 작은 말썽들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불쑥 튀어나와 삶을 어지럽힌다. '언젠가는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다'라는 기대로 보내는 하루는 불안하기만 하다. 매일 아침,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며 시작하던 일상이 그립다. 밤새 지독한 질병과 싸운 환자를 대하며 그들에게 위로가 되어주고자 했던 내가 이제는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을 앞에두고 두려움에 몸서리 치고있다. 있어야 할 곳을 알고 있지만, 존재를 드러내지 못한채 곁눈질만 해야하는 내가 비참하다. 나는 우리의 일상이 무너지지 않기를 원한다. 2020. 8. 30.
전공의 일기. 5-5화 수술실 "선생님 여기 수술장이에요. 인턴선생님이 환자분 모시고 들어오셔서 전화드렸어요" "네, 지금 엘리베이터 앞이에요. 금방 갈께요." 응급실의 혈뇨환자가 수술장으로 입실을 했다는 연락을 받은 뒤, 나는 수술장으로 향했다. 하루에도 열댓번씩 오가는 장소이지만, 매번 수술복을 갈아입는 갱의실을 지나칠때면 긴장을 하게 된다. 하늘색 수술모를 착용하고, 수술장용 마스크로 교체했다. 가운을 캐비넷에 정성스럽게 걸어두곤 환자가 있는 수술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혈종이 다 안빠지면 어쩌지? 입원장을 내야하나? 일단 계획은 혈종 다 제거하고, 피나는 곳은 지지고, 소변줄을 다시 넣고 색을 보다가 괜찮으면 퇴원해서 다음주 초에 외래를 내원하시도록 해야겠다.' "안녕하세요. 아까 응급실에서 뵈었던 비뇨의학과 전공의에요. 긴.. 2020. 8. 25.
전공의 일기. 5-4화. 실랑이. '혈종(hematoma)이 직경 6cm는 되겠다. 어머어마 한데...... 이건 foley(도뇨관)로는 도저히 뺄 수 가 없겠다. 아까 그만큼 drain(배액, 배출) 했는데 이정도 남아있는거면 내시경을 봐야겠다. active bleeding site(활동성 출혈)부위는 CT로는 안보이는데... 작은 혈관 손상인가? woozing bleeding인가? 일단 Scope(내시경)보는게 좋겠어' 환자의 CT를 확인하고, 그사이 검사가 완료된 혈색소 수치를 살펴봤다. Hb(혈색소)은 10.3 이전 검사 시 12 였던것을 감안하면, 출혈이 지속되어 빈혈상태로 진행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6cm에 이르는 거대한 혈종은 방광과 요도사이에서 소변의 배출을 막고 있는 상황이었고, 이로인해 방광은 크게 팽만되어 있.. 2020. 8. 23.
전공의 일기. 5-3화 내가 환자를 다시 만난것은 1주가 지난 화요일이었다. 좌측 옆구리 통증을 주소로 내원한 다른 환자를 검진하는 도중, 낯익은 환자가 눈에 들어왔다. 백발에 반 쯤 벗겨진 머리숱, 점잖게 갈색 양복을 입고 응급실 스테이션에서 간호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서 비뇨기과 선생님한테 전화 좀 해줘. 아파서 죽겄어. 전에도 그 선생님이 봤었으니까, 이번에도 똑같은 선생님한테 전화 해줘." "그 선생님 누구요? 연락하고 오신거에요?" 간호사가 물었다. "내가 어떻게 연락을 하고 와. 그냥 그 선생님이 내 사정을 잘 알고 있으니까 전화하면 와서 봐줄꺼야" "환자분 저희가 오신 순서하고, 응급한 정도에 따라서 담당 선생님께 연락을 드릴거에요. 조금만 앉아서 기다려 주세요. 전화한다고 되는게 아니에요. 지난번에 오신.. 2020. 8. 21.
전공의 일기. 5-2화 "여기 누워보세요. 머리는 저쪽으로 두시고 누우시면 됩니다" "아휴 죽겠다. 빨리좀 해줘. 힘들어" 환자의 하복부는 팽만이 심한 상태였고, 작은 압력에도 통증을 심하게 호소했다. 응급의학과에서 삽입한 도뇨관(foley catheter)는 16fr.(도뇨관의 두께를 나타내는 단위)로 현재 환자의 상태를 처치하기 위해서는 부족한 두께였다. "환자분 지금 들어가있는 소변줄을 제거하고, 조금 더 두꺼운 소변줄로 교체하겠습니다. 그래야 방광안에 있는 피떡(혈종, Hematoma)을 제거 할 수 있어요. 조금 불편하시겠지만, 참아주세요. 빼겠습니다!" 도뇨관 끝에는 balloon(풍선)이 있는데, 방광에 도뇨관이 삽입이 되면 풍선을 부풀려 소변줄이 방광압으로 인해 빠져나오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도뇨관을 제거할 .. 2020. 8. 18.
전공의 일기. 5-1화 당직교대 이후 어김없이 콜폰이 울렸다. 하루에도 백통이 넘는 전화로 실제로는 울리지 않았음에도 울리는 듯한 착각을 하게되는 때가 있었기 때문에, 전화기를 들어 화면을 보았다. 전화기에는 너무나 선명하게 [응급실]이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네, 비뇨의학과 당직입니다" "응급실 6구역, 000 환자가 의뢰되었습니다. 응급실 6구역, 000 환자가 의뢰되었습니다." 응급실의 호출은 응급의학과의 의뢰 시 자동으로 통화가 진행되기 때문에, 영혼없는 기계음이 반복되고는 자동으로 끊긴다. "네, 갑니다. 가요. 그만 전화하세요. 제발" 대답이 있을리 없는 수화기 넘어의 기계를 향해, 한숨섞인 푸념을 내어 놓고는 전화를 끊었다. 응급실에서 의뢰된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컴퓨터로 향했다. 전자차트를 켜고, 환자.. 2020. 8.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