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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의 일기. 5-19화 자식이 뭔지 숨찬 하루를 보냈다.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일을 하다 보니, 저녁 일과를 마치고 탈진상태가 되었다. 퇴근을 준비하고 전공의실을 나서던 순간,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가운을 입지 않고 병실로 향했다. 의사로서 환자를 만나는 것이 아닌, 친한 할아버지의 병문안으로써의 의미였다. "할아버지, 저 왔어요" "아고, 이선생 왔어? 옷을 이렇게 입으니까 못알아보겠네. 가운이 더 잘 어울려 이선생은" "퇴근하려던 길에 들렀어요. 저녁 식사는 하셨어요?" "병원은 밥을 제때제때 주니까 좋아. 당연히 먹었지." "잘하셨어요. 어떻게 다시 입원하시게 된 거에요?" "아들놈들 성화에 못 이겨서지 뭐. 지 엄마 힘들게 하지 말고 수술받으라고......" "아드님들이 수술을 받으라고 하셨어요?" "큰 아들놈이 여행을 가자고 해서 .. 2020. 10. 8.
전공의 일기. 5-18 익숙한 목소리 할아버지가 퇴원을 하고 한동안 절망감에 빠져나오지 못했다. 삶이 왜 이러는 것인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을 두고 열심히 살아야 하는게 맞는가를 고민했다. 할아버지와 나는 별 인연이랄 것도 없는 환자와 의사로 만났지만, 짧은 순간동안 서로를 이해하는 관계가 되었다. 할아버지의 퇴원은 내게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의사로서 환자를 포기하는 것일 수 있었고, 환자로서 본인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는 자기주도적 의사결정일 수 있었다. 어느 것이 더 옳은 것인지 윤리적 잣대를 드리울 수 없겠지만, 질병의 회복을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할아버지에게 치료를 강요하는 일은 옳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삶의 끝을 나는 어렴풋이 예측할 수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할아버지가 본인이 선택한 결정을 통해, 아름다.. 2020. 10. 7.
전공의 일기. 5-17 퇴원 할아버지는 내게 쪽지를 남기고 퇴원하셨다. '이선생. 항상 고마워. 밥이라도 한 끼 샀으면 해서 전화번호를 남겨달라 했는데, 연락처가 남겨져 있지 않아 대신 내 연락처를 적었어. 여행도 다니고 잘 지낼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언제 꼭 한번 연락줘. 못보고가서 아쉽네.' 항상 활기가 넘치던 활아버지의 쪽지에는 그 전과는 다른 담담함이 배어있었다. 잘 나오지 않는 검은색 볼펜을 눌러쓰신 흔적이 남아있는 쪽지를 다시 고이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병동을 벗어나 당직실로 향하는 길에 어제 할아버지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본인이 마주한 인생의 끝자락에서 할아버지는 쉽지 않은 결정을 했을 것이다. 끝까지 설득을 했어야 했나하는 후회가 들었지만, 금새 부질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사고를 접었다. 자신의 마지막이 언제쯤이 될 것.. 2020. 10. 5.
전공의 일기. 5-16화 노을 눈코뜰새 없이 바쁜 일정으로, 하루를 보냈다. 하루종일 수술방에 갇혀 다른 생각은 전혀 할 수 없었기에 중절모 할아버지를 찾을 여유가 없었다. 할아버지의 소식을 듣게 된 것은 늦은 퇴근을 하려던 참이었다. "내일 그 할아버지 퇴원하신다. 수술을 안하시겠다고 하시는데 설득을 해도 방법이 없네. 너한테 얘기해 줘야할 것 같아서" "내일 퇴원하신다고? 왜 수술은 안받으시겠다는데?" "몰라. 이대로 수술 안받으시면 1년안에 사망하실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도무지 설득이 안된다. 니가 가서 얘기해볼래?" "음...... 왜그러셨을까..... 그러실 분이 아닌데......내 말이라면 듣는 척이라도 해주실 것 같긴 해. 내가 가서 말씀 드려볼께" 중절모 할아버지를 담당하고 있던 동기와의 대화 후, 할아버지를 찾.. 2020. 10. 2.
전공의 일기. 5-15화 육종 '아...... 육종(Sarcoma)이네......' 우려했던 일이 생겼다. 방광에서 발견된 종양은 진행속도가 빠르고, 예후가 좋지 않은 육종이었다. 환자의 차트를 확인하고 한숨이 새어나왔다. 암이라고 모두 같은 암이 아니다. 종양의 종류에 따라 환자의 예후가 크게 차이나기 때문이다. 환자의 얼굴을 보기가 두려워졌다. 좋은 결과 있을거라 위로했던터라 더욱 그랬다. 환자의 병실을 찾았다. "이선생 왔어? 교수님 오셨다 가셨어. 수술을 또 하자고 하시네 이번엔 큰 수술이라고......" "네. 조직검사 결과를 저도 방금 보고 왔어요." "수술하면 살 수 있는겨? 많이 아픈가?" "꽤나 큰 수술이에요. 방광에서 발견된 종양의 성상이 그리 좋지 않아요. 진행도 빠를 수 있어요. 서둘러서 수술을 하셔야합니다." .. 2020. 9. 26.
전공의 일기. 5-14화 또 다시 혈뇨. "환자분 입실하셨습니다." 환자가 수술실로 들어왔다. 소변줄을 통해 시뻘건 혈뇨가 배액되고 있었다. 선홍색의 분명한 출혈이었다. 아마도 조직검사를 시행한 변연부에서 혈액의 누출이 발생하였을 것이다. 인턴이 환자를 수술용 침대로 옮겼다.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짙은 근심이 드리워져 있었다. 환의 하의가 벗겨지고, 수술을 위한 자세를 취했다. "또 피가 나네요. 최대한 빨리 끝내보겠습니다. 전에 해보셔서 아시죠?" "그려. 왜 자꾸 피가 나는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돼. 전에도 이선생이 수술해주고 피 안났으니까 이번에도 잘 부탁해. 나좀 살려줘. 죽겠어 진짜." "제가 최대한 통증없이 빠르게 해볼게요. 어제 수술한 부위 주변에 혈관이 파열되면서 피가 나는 것 같아요. 혹시 오전에 배에 힘을 많이 주셨어요?" "대변.. 2020. 9. 25.
전공의 일기. 5-13화 Hematuria 평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오전 회진을 마무리하고 중절모 할아버지의 병실을 찾았다. 어제와 다르게 밝은 표정으로 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환자의 미소를 보니, 마음이 놓이는 듯 했다. 어제 수술실에서는 종양 절제부위에서 출혈이 지속되어 이를 해결하기 위한 소작술을 한참이나 시행했다는 얘기를 들은터라, 환자의 소변색을 확인했다. 소변줄을 통해 투명한 소변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잘 주무셨어요?" "이선생 왔어? 아주 좋아. 밥도 맛있어. 오전에 교수님 오셨다 가셨는데 괜찮다고 기다려보라고 하시더라고. 얘기 듣고 나니까 마음이 놓여. 와줘서 고마워." "그래요? 소변색도 좋고, 오늘 아침 혈액검사 결과도 좋더라구요. 다행입니다." "그래도 조직검사 결과는 확인을 해야겠지? 언제쯤 나오는겨? 내일.. 2020. 9. 23.
막국수 대동면옥. [강릉 맛집 - 막국수] 수술 스케쥴이 기가 막혔다. 오전에 경요도 방광 종양 절제술 4개, 오후에 신요관 전적출술 1개, 국소마취 수술 3개. 오전 8시 수술방이 열리면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달려야 소화해 낼 수 있는 스케쥴이었다. 오전 회진을 마치고나서 바로 수술실로 향했다. 이미 환자의 마취는 끝난 상태였다. 오늘중으로 소화해 내야 할 스케쥴이 이미 너무 많아 시작도 하기 전에 지쳐버렸다. 체력안배 해가며, 오전 수술을 마치고 잠깐 점심식사시간 이었다. 지친 상태로, 꾸역꾸역 밥을 입으로 밀어넣던 중, 강릉 맛집에 대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대동면옥] 이라는 막국수 집으로, 주문진에 위치하고 있는 이 집은 그야말로 이름난 맛집으로, 막국수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전국에서 찾아 올 정도로 유명하다는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2020. 9. 22.
전공의 일기. 5-12화 Urine clear [카톡] 저녁 10시경 카카오톡 알림이 울렸다. 보통 이시간에 들리는 알람은 내일 스케쥴 배정표인 경우가 많았다. 동기에게 내일 수술 일정에 대해 부탁을 해 놓은 것이 있었기에 서둘러 메세지를 확인했다. '일정표가 왔구만. 어디보자..... donor nephrectomy(공여 신장 적출술) 배정이네......' 아쉬운 마음이 컸다. 중절모 할아버지의 수술장에 들어가고 싶었기에 부탁을 해 두었지만, 스케쥴을 짜는 입장에서는 원하는 수술에 배정을 해준다는것이 매우 곤욕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정을 확인하고 있는 중에 동기로 부터 메세지가 왔다. 원하는 수술에 배정해주고 싶었는데 수술 일정이 빡빡해 조절이 어려워, 그 수술에는 넣어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해한다고 답장을 남기고 잠자리에 들었다.. 2020. 9. 22.
전공의 일기. 5-11화 수술 환자가 입원했다. 내일 예정된 경요도 방광종양 절제술을 위해서였다. 병실 복도에서 만난 환자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내일 예정된 수술은 사실 종양의 완전한 제거가 목적이기 보다는 방광 점막 하층에 위치한 종괴의 성상을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병실 복도에서 환자를 마주했다. "이선생, 나왔어." "얼굴이 너무 안좋으세요. 걱정이 많이 되시죠? 최근에 잠을 잘 못주무셨어요?" "어 그려, 방광에 뭐가 또 보인다고 하니까 너무 걱정이 되는거여. 이제 살만큼 살았지만, 이렇게 죽는건 아닌가 무서워." "내일 있을 수술은 수술 자체가 어렵거나 위험하지는 않아요. 전에 내시경실에서 했던 조직검사는 방광 점막에 국한된 검사이기 때문에 이번에 수술방에서 조금 더 깊이 절제해서 이게 어떤 종양인지를 알.. 2020. 9. 21.
전공의 일기. 5-10화 재발 6개월이 지났다. 백발 중절모 할아버지의 존재는 이미 흐릿해져 있었다. 오후 회진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 동기로부터 그 환자의 검사 결과를 듣게 되었다. 마침 오늘이 할아버지의 정기 검진이 있었던 날이었다. "야, 너 혹시 000 이라는 환자분 알아?" "어, 왜?" "오늘 Cysto(방광내시경) 내가 오후에 담당이었잖아, 그분이 네가 내려와서 검사하게 해달라고 하셔서. 아는 사람인가 했지" "아마도 응급실서부터 내가 쭉 봐오던 환자분이라 그럴거야. 그 할아버지 젠틀하지 않아?" "내가 오늘 검사 담당이 나라고, 그 선생은 수술 들어갔다고 하니까 그냥 수긍하시긴 했어." "검사 결과는? 괜찮았어?" "Radiation Cystitis(방사선 방광염)는 여전히 보이고, 출혈은 없었는데, Bladder(방광.. 2020. 9. 20.
공허함을 달래려 찾은 신리면옥. [강릉 맛집-막국수] 강릉은 영감을 일으키는 도시임에 틀림없다. 바다와 산이 적절히 어우러져, 빼어난 절경을 뽐낸다. 매 3개월마다 다시 찾는 강릉은 올 때마다 그대로인 듯 새롭다. 계절이 변할 때마다 도시가 풍기는 아름다움이 마치 색동옷과 같이 다채롭게 변한다. 하지만, 이번 강릉 파견은 달랐다. 날은 화창하지만, 기분은 우울한. 그래서 더 우울한 날들이었다.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의사 단체행동이 절정에 이르렀을 무렵. 의사로서의 책임감이 짊어져야할 짐이 되어 나를 압박해왔다. 삼일 내 새벽잠 쪼개어 가며 새로운 법안이 사회에 미칠 영향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으로 보냈고, 공식적으로는 단체 행동을 이어나가면서, 남들에게 나를 드러내지 않는 새벽에 환자의 상태를 살피다 보니 탈진상태가 되었다. 점심 한 끼를 병원식당에서 먹기 .. 2020. 9.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