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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집과 와인.

막국수

by ASLAN_URO 2020. 9. 9.

https://unsplash.com/

혈기 왕성하던 20대 초반, 먹어도 먹어도 배고팠던 때, 친구들과 빈 주머니 털어가며 맛집을 찾아다닌 적 있었다. 서로 하나씩 주변 맛집을 찾아 추천하면 여섯 명이 모여 우르르 몰려가 메뉴판을 눈으로 흘기며, 주머니 사정에 맞춰 최대한 푸짐한 음식을 주문했고, 적당히 근사한 음식들이 눈 앞에 펼쳐지면, 음식에 코를 박고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던 기억이 있다. 

우리 모임의 가장 키가 큰 녀석이 군대를 갈 때 였다. 이미 모임의 몇은 국방부 시계나 주야장천 바라보며 전역날을 기다리는 군인 아저씨가 되어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완전한 모임의 모양새를 갖추기는 힘들었지만, 가는 놈 배라도 불려서 보내자라는 마음으로 급하게 모이기로 했었다. 

"얌마 끌려가기 전에 뭐 먹고 싶냐?"

"야, 다른 게 뭔 필요야. 편의점 가서 초코파이나 왕창 사주자. 그렇게 먹고 싶다는데. 크크크"

"군대를 나만 갈 것 같냐? 이 간나 새끼들아?"

"그러니까 너 먹고 싶은거 먹자고 모였잖아. 치킨 먹을래? 피자 사줄까?"

"됐고, 이포로 가자. 죽이는데 하나 있어."

"이포? 거기 맛집이 있어?"

"너네 천서리 막국수라고 들어봤냐? 날도 더운데 거기 가서 시원하게 한 그릇하고 수육까지 먹고 싶다. 나 먹고 싶은 거니까 잔말 말고 따라와"

"븅신 맛없기만 해봐."

https://pixabay.com/, 막국수

우리는 눈 앞에 놓인 정갈한 막국수 한 대접과, 뽀얀 수육, 막걸리 같았던 육수를 마주하곤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터무니없이 적은 양에 한번 놀라고, 생각보다 볼 품 없는 상차림에 한 번 더 놀랐다. 하지만, 입대를 앞둔 키다리 녀석은 뭐가 그리 좋은 지 면을 자르지도 않고 비벼대기 시작했다. 다른 친구 놈들의 비아냥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 식탁에 본인과 막국수만 있는 듯 집중하고 있었다. 대꾸 없는 키다리를 기다리지 못하고, 다른 친구 한 놈이 누리끼리한 육수를 컵에 부어 한 모금 들이켰다.

"와...... 뭐지 이거?"

"뭔데? 무슨 맛인데?"

"와...... 이제껏 먹어 본 육수 중에 제일 맛있어. 닥치고 먹어봐"

너도 나도 육수 주전자를 옮겨가며 백자색 컵을 채웠다. 나도 육수를 들어 향을 맡았다. 고기 향인가? 후추 냄새도 나고. 이게 무슨 맛일지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다. 육수를 한 모금 마신 뒤, 감탄이 왜 나왔는지 알게 되었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감칠맛이었다. 면 위에 놓인 양념장을 정성스럽게 면과 비비기 시작했다. 키다리가 이해됐다. 비벼진 면을 한 젓가락 입에 물고, 이건 천상의 맛이라 생각했다. 적당한 맵기, 무심한 듯 툭툭 끊어지는 면발, 더운 날씨를 날려 줄 만큼 시원함에 출처모를 감칠맛이 입혀져 상상하지 못한 맛이 입안에서 연주되고 있었다. 군대 가는 키다리는 면을 반쯤 비워내고는, 수육을 집었고, 면과 함께 입에 넣으며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친구들 모두 키다리를 따라 했다. 누가 시킨 것은 아니었지만, 저놈이 하는 대로 하면 더 맛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모두 수육을 면으로 감아 입으로 향했다. 그 이후로 우리는 말없이 음식에 집중하게 됐다. 한 그릇을 다 비워낸 뒤 우리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고, 별다른 상의 없이 한 그릇 씩 더 주문했고, 양념 하나 없이 그릇을 설거지했다. 

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그 당시의 기억이 생생한 것을 보면, 맛집을 방문한다는 것은 먹는 즐거움, 보는 즐거움을 경험할 뿐 아니라, 그곳을 함께 방문한 사람들과 시간과 기억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나는 맛집을 소개하고 이 맛을 공유하고자 블로그에 글을 쓰고, 사진을 담는 것은 아니다. 내 추억이 온전히 남아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 글을 쓰고자 한다. 조금 더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이 글을 읽고 나와 같은 장소를 방문한 사람이 있다면, 맛있는 음식과 좋은 사람, 행복한 시간을 보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