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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집과 와인.

와인, 그냥 마시면 안될까?

by ASLAN_URO 2020. 10. 14.
나는 특별한 취미가 없었다.

 학교에 다니던 시기에는 유도나 야구 같은 몸으로 하는 활동들을 즐겼지만, 직장에 다니면서부터는 시간도 없고, 몸은 힘들어 취미를 가져 볼 꿈 조차 꾸지 못했다. 취미라는 것이 관심이 있어서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힘들어, 이제는 나의 일상이 견뎌 내야 할 짐이 되었다. 쌓여가는 스트레스에, 정점을 모르고 늘어만 가는 체중, 딱히 일상의 무료함을 견뎌낼 방법을 찾지 못해, 늘어가는 담배. 점점 인생이 피폐해져 감을 느꼈다. 

 

 

 

'술은 잘 못하는데 퇴근해서 딱 한잔, 맛있는 와인이 먹고싶다.'

  나는 술에는 잼병이다. 덩치는 커다랗고, 생긴 건 우락부락한데 이상하게 술에는 약하다. 말술로 마실 것 같이 생겼지만 소주 반 병에 얼굴이 피가 나듯 붉어지고, 소주는 냄새만 맡아도 구역이 올라오니 도무지 술과 친하려야 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신기하게, 딱 하나. 와인은 그렇지 않았다. 

 

 와인을 처음으로 접한 계기는 '교양수업' 때였다. 학계에서는 꽤나 유명한 내과 교수님이셨는데, 와인을 너무 사랑하셔서 프랑스로 와인여행을 다녀오실 정도였다. 우리 학교를 졸업한 학생은 적어도 와인에 대해서는 기본을 갖춰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곤 하셨는데, 그게 발단이 되어 교양수업으로 채택되었던 것이다. 수업은 와인 테이블 매너, 세계적인 와인 산지, 라벨 보는 법, 포도 품종에 따른 와인의 특징 등등 수많은 내용들을 다루었던 것이 기억이 난다. 내가 졸업을 했으니, 졸업생은 맞는데 그때의 수업을 바탕으로 와인의 기본을 갖추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와인은 어려운 술'이었다. 포도 품종도 불어로 이름 붙어 발음조차 어려운 것들이 대부분이었고, 와인은 반시계 방향으로 돌려 풍미를 내야 하고, 최적의 온도는 15도이기 때문에 특별한 셀러에 보관하는 것이 좋다 등등. 소주처럼 뚜껑을 따서 잔에 따라 마시면 되는, 그런 술이 아니었다. 향도 좋고, 색도 좋고, 맛도 좋은 와인을 편히 접하기에 내가 지켜야 할 사항들이 너무 많았다. 

 

@George Deipris

 

 '그냥 마시면 안 될까?' 문득 생각이 들었다. 아무 컵에다가, 냉장고에 넣어 보관해 둔, 마트에서 쉽게 구매가 가능한 와인을 따라 마시면 안될 이유는 무엇일까? 퇴근해서 자기 전에 딱 한잔, 맛있는 와인이 먹고 싶어 졌다. 마침 스트레스도 받던 차에 알코올의 힘을 빌리면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해 찬장을 열어, 선물 받아 처박아 둔 와인을 꺼내 들었다. 젓가락으로 코르크를 후벼 파 빼내고, 아들놈 뽀로로 컵에 반쯤 따라 향을 맡았다. 첫 향이 강렬하게 코를 강타했고, 시간이 지나자 향기로움으로 변해갔다. 혀를 감싸는 거친 탄닌의 감촉을 느끼며, 한 모금 삼키자, 식도를 따라 따쓰함이 전해졌고,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뽀로로 컵에 담긴 와인도 이리 좋은 것을 왜 미리 마실 생각을 못했을까 후회됐다. 

 

 나는 매너는 모르겠다. 역사도 모르겠고, 무슨 포도가 좋은지도 모르겠는데 보랏빛 아름다운 와인을 아무런 컵에 담아 마셔도 맛만 좋더라. 이제는 내 방식대로 마셔보련다. 와인 한잔에 고단한 하루가 녹아내리는데 이보다 더 좋은 취미가 어디 있을까. 이제부터 나는 와인을 내 방식대로 즐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