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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의 일기./나의 중절모 할아버지37

전공의 일기. 5-25화 유착 수술은 험난했다. 전립선 암으로 이미 한차례 수술을 시행했었고, 잔여 암으로 인해 방사선 치료를 받았기 때문에 골반강 내의 장기들이 구분이 지어지지 않을 정도로 유착되어 있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손가락을 이용하여 주변의 장기와 박리를 진행할 수 있지만, 할아버지의 경우에는 전기 소작기를 이용해 경험과 감으로 장기를 박리해 나아가는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예상보다 험난한 상황에 의료진은 예민해져 있었다. "석션(Suction, 음압을 이용하여 체액을 흡인하는 기구) 좀 똑바로 해!" "네 알겠습니다." "스무스로 여기 잡아" "네 교수님" 경험많은 교수님의 리드로 조직을 절제하기 시작한 지 1시간이 지났을까? 환자의 골반강에서 방광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의 방광에 자리잡은 육종(S.. 2020. 10. 25.
전공의 일기. 5-24화 개복 수술대에 누워있는 할아버지를 둘러싸고 많은 의료진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비뇨의학과에서 시행하는 수술 중 가장 위험하고, 어려운 수술이기에 할아버지의 안전을 위한 준비가 철저히 이루어져야 했다. 주기적으로 들려오는 마취기계의 소리가 차가운 수술방의 공기를 더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마취과 의사는 할어버지의 좌측 경정맥에 중심정맥관을 삽입하였고, 우측 팔의 요골동맥에 동맥압 측정을 위한 A-line(Arterior line)을 잡았다. 긴 수술을 견디기 위한 안전장치들이 준비되었고, 나는 할아버지의 옆에 진갈색 소독약을 들고 섰다. 조명에 의해 창백하리만큼 하얗게 비춰지는 할아버지의 복부를 진갈색 소독약으로 섬세히 닦아냈다. "오늘 절개는 long-mid line(정중절개)으로 할겁니다. 명치부터 회음.. 2020. 10. 21.
전공의 일기. 5-23화 6시간 "오늘이 수술 날입니다. 환자분께서 보호자분들께 설명을 해드리길 원하셔서 이렇게 모시게 되었습니다."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이제야 병원에 오게 되었습니다. 오늘 아버지 수술은 잘되겠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 역시 환자분께서 무사히 수술을 받으시고 건강하게 퇴원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께서 도통 말씀을 안 하셔서 그러는데...... 지금 저희 아버지 상태가 정확히 어떤가요?" "네? 환자분께서 말씀을 안하셨던가요?" "아버지께서는 별거 아니라고, 걱정 말라고만 하셨지 지금 상태에 대해서는 말씀을 해 주신 게 없습니다. 저희도 답답했지만 서로 생계가 바쁘다 보니 신경을 쓰질 못했습니다." "환자분께서는 아드님과의 여행을 다녀오고 현재 상태를 분명히 말씀드렸다고 하시던데요? 환자분의 .. 2020. 10. 19.
전공의 일기. 5-22화 수술날 아침. 어김없이 날이 밝았고, 드디어 수술이 예정된 날 아침이 되었다. 할아버지를 괴롭혔던 방광의 육종이 이제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유착으로 인해 쉽지 않은 수술이 될 것임을 알고 있던 터라, 아침부터 모두들 긴장한 모습이었다. 할아버지는 밤새 잠을 못 이루셨는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제 좀 주무셨어요? 표정을 보니까 하나도 못 주무신것 같은데요?" "에이 이선생. 내가 암수술 한 두번 받아보나? 잘 잤어 아주. 컨디션 최고야 최고" "딱 보니까 피곤한 얼굴인데요 뭐. 하나도 못주무신것 같구먼......" "아니야 잘 잤어. 이따가 아들놈 들하고, 마누라하고 병원에 온다는데 이선생님 만나서 얘기 좀 해줄 수 있을까?" "네, 당연히 해야죠. 제가 어떤 얘기를 해드리면 될까요?" "수술 별거 아니라.. 2020. 10. 14.
전공의 일기. 5-21 후회 수술을 결심하고 난 뒤 진행되었던 검사 결과가 취합되었다. 다행인 것은 할아버지의 전신상태가 수술을 견디기에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심장 초음파는 할아버지의 심기능이 충분히 안정적임을 보여주었고, 폐 기능 검사 또한, 수술을 진행하기에 문제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할아버지의 방광에 자리 잡고 있던 육종의 크기가 더욱 커졌다는 것이고, 간에서 새롭게 생겨난 병변들이 관찰되었다는 것이다. 아직 조직검사를 시행하기에는 그 크기가 작아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전이를 확신할만한 근거는 뚜렷이 없었지만, 정황상 육종의 간 전이를 의심하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다. 수술을 위한 준비가 끝났고, 수술이 내일로 다가왔다. "할아버지, 저 왔어요" "이선생 왔어?" "왜 이렇게 기운이 없으세요? 요즘 걱정이 많이 .. 2020. 10. 13.
전공의 일기. 5-20 우려 본격적인 수술을 위한 준비가 시작됐다. 할아버지의 암덩이가 지난 3개월간 얼마나 얌전히 있었을지 평가를 해야 했다. CT를 시행하여 전이 여부를 평가했고, 뒤 이어 신장기능은 얼마나 보존된 상태인지 핵의학 검사가 이어졌다. 마취를 위한 심장기능 평가와 호흡기 검사가 함께 이루어졌고, 검사 결과들이 하나씩 취합되었다. 쉼 없이 진행되는 검사일정에서 할아버지가 지쳐가는 것이 보였다. "할아버지, 검사는 잘 받으셨어요? 오늘따라 기운이 없어보이시네요." "이선생 왔어? 하루 종일 검사실 불려 다니면서 온갖 검사 다 한다고 지쳤어 아주." "고생하셨어요. 수술 준비는 이제 얼추 마무리된 것 같아요. 아직 수술 일정은 안 잡힌 것 같은데, 교수님이 혹시 날짜를 지정해 주시던가요?" "다음 주쯤 검사 결과보고 날짜.. 2020. 10. 11.
전공의 일기. 5-19화 자식이 뭔지 숨찬 하루를 보냈다.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일을 하다 보니, 저녁 일과를 마치고 탈진상태가 되었다. 퇴근을 준비하고 전공의실을 나서던 순간,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가운을 입지 않고 병실로 향했다. 의사로서 환자를 만나는 것이 아닌, 친한 할아버지의 병문안으로써의 의미였다. "할아버지, 저 왔어요" "아고, 이선생 왔어? 옷을 이렇게 입으니까 못알아보겠네. 가운이 더 잘 어울려 이선생은" "퇴근하려던 길에 들렀어요. 저녁 식사는 하셨어요?" "병원은 밥을 제때제때 주니까 좋아. 당연히 먹었지." "잘하셨어요. 어떻게 다시 입원하시게 된 거에요?" "아들놈들 성화에 못 이겨서지 뭐. 지 엄마 힘들게 하지 말고 수술받으라고......" "아드님들이 수술을 받으라고 하셨어요?" "큰 아들놈이 여행을 가자고 해서 .. 2020. 10. 8.
전공의 일기. 5-18 익숙한 목소리 할아버지가 퇴원을 하고 한동안 절망감에 빠져나오지 못했다. 삶이 왜 이러는 것인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을 두고 열심히 살아야 하는게 맞는가를 고민했다. 할아버지와 나는 별 인연이랄 것도 없는 환자와 의사로 만났지만, 짧은 순간동안 서로를 이해하는 관계가 되었다. 할아버지의 퇴원은 내게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의사로서 환자를 포기하는 것일 수 있었고, 환자로서 본인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는 자기주도적 의사결정일 수 있었다. 어느 것이 더 옳은 것인지 윤리적 잣대를 드리울 수 없겠지만, 질병의 회복을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할아버지에게 치료를 강요하는 일은 옳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삶의 끝을 나는 어렴풋이 예측할 수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할아버지가 본인이 선택한 결정을 통해, 아름다.. 2020. 10. 7.
전공의 일기. 5-17 퇴원 할아버지는 내게 쪽지를 남기고 퇴원하셨다. '이선생. 항상 고마워. 밥이라도 한 끼 샀으면 해서 전화번호를 남겨달라 했는데, 연락처가 남겨져 있지 않아 대신 내 연락처를 적었어. 여행도 다니고 잘 지낼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언제 꼭 한번 연락줘. 못보고가서 아쉽네.' 항상 활기가 넘치던 활아버지의 쪽지에는 그 전과는 다른 담담함이 배어있었다. 잘 나오지 않는 검은색 볼펜을 눌러쓰신 흔적이 남아있는 쪽지를 다시 고이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병동을 벗어나 당직실로 향하는 길에 어제 할아버지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본인이 마주한 인생의 끝자락에서 할아버지는 쉽지 않은 결정을 했을 것이다. 끝까지 설득을 했어야 했나하는 후회가 들었지만, 금새 부질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사고를 접었다. 자신의 마지막이 언제쯤이 될 것.. 2020. 10. 5.
전공의 일기. 5-16화 노을 눈코뜰새 없이 바쁜 일정으로, 하루를 보냈다. 하루종일 수술방에 갇혀 다른 생각은 전혀 할 수 없었기에 중절모 할아버지를 찾을 여유가 없었다. 할아버지의 소식을 듣게 된 것은 늦은 퇴근을 하려던 참이었다. "내일 그 할아버지 퇴원하신다. 수술을 안하시겠다고 하시는데 설득을 해도 방법이 없네. 너한테 얘기해 줘야할 것 같아서" "내일 퇴원하신다고? 왜 수술은 안받으시겠다는데?" "몰라. 이대로 수술 안받으시면 1년안에 사망하실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도무지 설득이 안된다. 니가 가서 얘기해볼래?" "음...... 왜그러셨을까..... 그러실 분이 아닌데......내 말이라면 듣는 척이라도 해주실 것 같긴 해. 내가 가서 말씀 드려볼께" 중절모 할아버지를 담당하고 있던 동기와의 대화 후, 할아버지를 찾.. 2020. 10. 2.
전공의 일기. 5-15화 육종 '아...... 육종(Sarcoma)이네......' 우려했던 일이 생겼다. 방광에서 발견된 종양은 진행속도가 빠르고, 예후가 좋지 않은 육종이었다. 환자의 차트를 확인하고 한숨이 새어나왔다. 암이라고 모두 같은 암이 아니다. 종양의 종류에 따라 환자의 예후가 크게 차이나기 때문이다. 환자의 얼굴을 보기가 두려워졌다. 좋은 결과 있을거라 위로했던터라 더욱 그랬다. 환자의 병실을 찾았다. "이선생 왔어? 교수님 오셨다 가셨어. 수술을 또 하자고 하시네 이번엔 큰 수술이라고......" "네. 조직검사 결과를 저도 방금 보고 왔어요." "수술하면 살 수 있는겨? 많이 아픈가?" "꽤나 큰 수술이에요. 방광에서 발견된 종양의 성상이 그리 좋지 않아요. 진행도 빠를 수 있어요. 서둘러서 수술을 하셔야합니다." .. 2020. 9. 26.
전공의 일기. 5-14화 또 다시 혈뇨. "환자분 입실하셨습니다." 환자가 수술실로 들어왔다. 소변줄을 통해 시뻘건 혈뇨가 배액되고 있었다. 선홍색의 분명한 출혈이었다. 아마도 조직검사를 시행한 변연부에서 혈액의 누출이 발생하였을 것이다. 인턴이 환자를 수술용 침대로 옮겼다.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짙은 근심이 드리워져 있었다. 환의 하의가 벗겨지고, 수술을 위한 자세를 취했다. "또 피가 나네요. 최대한 빨리 끝내보겠습니다. 전에 해보셔서 아시죠?" "그려. 왜 자꾸 피가 나는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돼. 전에도 이선생이 수술해주고 피 안났으니까 이번에도 잘 부탁해. 나좀 살려줘. 죽겠어 진짜." "제가 최대한 통증없이 빠르게 해볼게요. 어제 수술한 부위 주변에 혈관이 파열되면서 피가 나는 것 같아요. 혹시 오전에 배에 힘을 많이 주셨어요?" "대변.. 2020. 9.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