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할아버지가 수액 걸이대에 의지해 위태롭게 병동을 걷는 모습을 보았다. 간병인의 도움을 받아 한 걸음씩 내딛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짠하게 다가왔다. 두어 발자국 내딛고 가느다란 수액 걸이대에 몸을 지탱하고 쉬길 반복하며, 할아버지는 내가 있는 쪽으로 가까워졌다.
'힘이 드셔도 이겨내셔야 해요. 힘내세요.'
할아버지가 나를 발견하면, 운동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며 몸을 숨겼다. 애처롭지만, 과정을 이겨내셔야 했기에 멀리서 응원하는 것에 만족했다.
오후 회진 시작 전 할아버지를 찾았다. 첫 운동에 진이 다 빠졌는지, 할아버지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오늘은 운동을 좀 하셨어요?"
"아이고, 말도 마. 이선생이 검사한다고 해서 열심히 했어. 힘들어 죽겠네"
"무슨 죽겠다는 말씀을 그렇게 쉽게 하세요. 운동 열심히 하신 거 맞아요? 아닌 것 같은데......"
"열심히 했어. 여기 병동을 두 바퀴나 돌았다고, 여기 아줌마한테 물어봐"
"알았어요. 장난이에요. 가스는 나오셨어요?"
"트림은 계속했어. 이제 배도 좀 편한데 이거 콧줄 좀 빼면 안 될까? 걸리적거려서 못 참겠어"
"아직은요. 방귀가 나오고 X-ray 괜찮아지면 그때 빼 드릴게요. 그때까지는 물도 드시면 안 됩니다."
"물 좀 먹게 해 줘. 입도 마르고 목도 마르고 환장 혀"
"미지근한 물로 가글을 하세요. 삼키시는 건 안돼요. 아직."
"사람이 왜 그렇게 야박하게 굴어? 이선생. 그러지 말고 한 모금만 먹자"
"안된다고 말씀드렸어요. 혹여나 드신 물이 장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고여있다가 구토라도 하게 되면, 폐렴이 올 수 있어요. 절대 안 됩니다."
"거 참 야박하게......"
"운동 열심히 하셨다고 하셨으니까 오늘 밤에 가스 나오길 기다려 볼게요. 검사 결과 좋아지면 바로 물 드리겠습니다."
"그려...... 오늘 교수님은 안 오시나?"
"조금 이따가 나오실 거예요. 어디 가시지 마시고 여기서 기다리셔요."
복부 수술에서 가장 흔하게 마주하는 합병증은 장마비(ileus)이다. 대부분 수술을 받은 환자들은 장의 운동이 회복되기 전까지 금식을 유지한다. 특히, 장을 조작하는 수술을 한 경우나 수술 시간이 길었던 경우는 장의 마비 증상이 해결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이 시기에 환자들의 고통이 심하다. 목은 마르나 물을 먹지 못하는 고통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상상하기 조차 힘들 것이다.
막힌 하수구에 물을 흘리면 역류하는 것처럼, 장이 마비된 상황에서 음식물을 섭취하게 되면 필시 구토를 하게 되고, 환자가 고령인 경우 토사물이 기도로 넘어가 흡인성 폐렴을 유발할 수 있다. 흡인성 폐렴은 수술을 받은 고령의 환자에서 사망률을 상당히 높이기 때문에 의료진들이 상당히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할아버지의 힘든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장기적으로 할아버지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할아버지를 다그쳤다. 이 힘든 시기가 빨리 지나가 다시 할머니가 손수 담근 김치에 하얀 쌀밥을 드시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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