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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의 일기./나의 중절모 할아버지

전공의 일기. 5-27

by ASLAN_URO 2020. 11. 11.

날이 밝았다. 처치실에서 관찰 중이던 할아버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당직실을 나섰다. 근치적 방광 절제술은 수술 후 환자의 상태가 급속도로 악화될 수 있기 때문에 병동에 별도로 마련된 공간에서 환자를 관찰하게 된다. 주렁주렁 수액이 달린 수액 걸이대와, 할아버지의 심장 상태, 산소 포화도를 확인하기 위한 전극들이 어지럽게 연결되어 있었다. 

 

"주무세요? 통증은 조금 나아지셨어요?"

 

"이선생...... 아파...... 아파......"

 

"어디가 아프셔요? 특별하게 더 아픈곳이 있어요?"

 

"그냥 아파...... 다 아파......"

 

"잠깐만 배 좀 만져볼게요"

 

할아버지의 복대를 풀고, 어제 수술한 부위를 관찰했다. 배꼽 위아래로 길게 절개되었던 수술 상처가 나이론 실로 봉합되어 있는 모습이 기찻길을 연상시켰다. 다행히 수술 부위의 이상소견은 없었다. 수술부위에 삽입되어 있던 JP catheter 역시 검붉은 색으로 보였고, 양 역시 걱정할 수준은 되지 않았다. 배를 두드려 가스 상태를 확인하고, 압통이 느껴지는 부위가 있는지 관찰했다. 

 

"할아버지. 제가 배를 만져보니까 특별한 이상은 없어보여요. 문제가 있어서 아프다기보다는 수술 이후에 발생한 통증이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숨이 차거나, 가슴이 아프거나 하진 않으시죠?"

 

"그런 건 없는데 배가 너무 아파...... 진통제 좀 줘......"

 

"진통제는 필요할 때 마다 맞으실 수 있게 적절하게 처방 넣어뒀어요. 곧 간호사 선생님이 주실 거예요."

 

"이선생 고마워. 고마워 이선생. 근데 너무 아파......"

 

"그것 보세요. 제가 엄청 아파서 우실 수도 있다고 했잖아요. 암 수술 여러 번 했다고 자신 있다고 하셨던 분이 이렇게 엄살 피우실 거예요?"

 

"엄살이 아니고 이번엔 진짜 아파. 이건 장난이 아니여 이선생."

 

"엄청 아프실 거 알아요. 진통제 서둘러 챙겨드리라고 얘기 해 둘게요. 오늘 오후부터는 운동을 하셔야 해요. 오후에 꼭 걸어보세요."

 

"누워있어도 아픈데 어떻게 걸어. 못해."

 

"하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다리에서 혈전 생겨서 나중에는 숨도 잘 못 쉬시게 되는 수도 있어요. 걸어야 혈전도 안 생기고, 장도 풀리고, 염증물질들이 고이지 않아요." 

 

"오늘만 좀 봐줘. 힘들어서 그래."

 

"안돼요. 아드님은 어디 가셨어요?"

 

"화장실 갔어. 씻는다고. 나 물은 좀 마시면 안 될까? 이선생?"

 

"안됩니다. 아직 콧 줄 (L-tube, levin tube)도 안 뽑으셨잖아요. 매일 찍은 복부 X-ray 사진 보고 제가 뺄지 말지 결정해 드릴 거예요. 내일이나 모레쯤 물 드실 수 있는지 결정해 드릴 테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목마르고, 배 아프고 아주 죽겠어. 살려줘 이선생."

 

"몰라요. 제 말씀 잘 들으셔서 운동 열심히 하시고, 가스 나오면 그때 생각해볼래요."

 

"아우 농담 아니야 살려줘......"

 

"저도 농담 아니에요. 꼭 오후에 운동하셔야 합니다? 이따가 제가 검사하러 올 거예요."

 

"알겠어......"

 

"이따가 오후에 다시 올게요."

 

 

할아버지의 상태는 비교적 양호했다. 요루를 통한 배액도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었고, 혈액검사도 양호했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복부의 가스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시행한 X-ray에서 심한 장마비 소견이 관찰되었다는 것이다. 소장을 잘라 요루를 만들었기에 장 운동이 회복되려면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것이다. 할아버지에게 농담처럼 건넨 말들은 농담이 아닌 나의 진심이었다. 중력에 의해 장이 풀어져 제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가스가 배출되고, 장 운동이 제 자리를 찾으면 변을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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