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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의 일기./하늘파란 강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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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의 일기. 4-13화 "선생님 CT 결과 나왔습니다. 현재 Active bleeding focus(활동성 출혈, 피가 나고 있는 부위)는 찾을 수 없으나, 복강 내 Hematoma(혈종, 피가 굳은 상태의 덩어리)가 크게 확인되고 있고, 위치는 우측 하복부입니다. Angio(혈관조영술)를 시행해 볼 수 있으나. 환자 활력징후가 좋지 않아서 Exploration(탐색적 개복술)하는 게 낫겠다는 판독입니다. 환자 혈압이 sBP(수축기 혈압)가 50까지 떨어져서 Vaso 시작하겠습니다." CT실에서 당직 전공의의 전화가 걸려왔다. 현재 상태가 좋지 않고, 명확하게 출혈 부위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사이 환자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어 다른 종류의 승압제까지 투여를 하고 있었다. 이대로 두었다간 한시..
전공의 일기. 4-12화 "보호자분이세요? 여기 병원입니다. 새벽에 전화드려 죄송합니다. 통화가 가능하실까요?" "네, 무슨일이세요?" "환자분의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CT를 찍어봐야 알겠지만, 현재 상태는 복강내 출혈이 의심되는 상황입니다. 혈압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고, 현재는 승압제(혈압을 올리기 위한 약물)를 사용하고 있어요." "네? 아까는 수술이 잘 됐다고 하셨잖아요. 어쩌면 좋아...... 살 수 있어요? 뭘 해야하나요? 살려주세요" "수술이후 활력징후와 혈액검사는 괜찮았습니다. 수술과정에서도 특별히 문제가 될 사항은 없었어요. 출혈인지 아닌지, 출혈이 있다면 어디서 있는건지는 확인해봐야 알겠지만, 수술이나 시술을 해야하는 상황은 분명합니다. 혹시 병원에 계시나요?" "아니요. 아까 수술끝나고 집에 잠깐 와있어요...
전공의 일기. 4-11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중환자실에 도착했다. 환자가 있는 8번 자리에는 많은 간호사들이 위급상황에 대처하고 있었다. 수혈은 진행 중이었고, 환자의 의식은 있었다. "환자분 지금 어디가 제일 불편하세요? 배가 아프세요?" "으으..." 간신히 내뱉은 환자의 대답을 근거로, 신체진찰을 시작했다. JP catheter의 양은 음압을 걸어두면 바로 차오를 정도로 배액되고 있었고, 색깔도 선혈에 가까웠다. 수술부위를 지지하기 위해 복대가 채워져 있었지만, 배는 풍선처럼 부풀어있었다. 수술 부위인 우측을 중심으로,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고, 통증의 양상이 전체 복부를 포함하는 상태였다. 복부 청진에서는 장음이 들리지 않았고, 환자의 결막은 허옇게 변해있었다. '출혈이다. 이건 틀림없는 복강내 출혈의 징후다.' "피 세개..
전공의 일기. 4-10화 "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 책상을 뒤흔드는 진동과 불쾌한 소음으로 눈을 떴다. 수술이 끝나고 환자의 차트를 정리하기 위해 당직실로 향했던 나는 는 환자의 혈액검사 결과가 나오길 기다리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고 말았던 것이다. "네 비뇨의학과 전공의입니다." "선생님 여기 CSICU(순환기 외과계 중환자실)인데요, 혈액검사 결과 노티 드리려 전화드렸어요." "네 우선 불러주시겠어요?" 엎드려서 잠이 든 여파로, 안경알은 기름기가 번져있었고, 시야가 흐렸다. 애를 써서 작은 글씨를 읽으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Hb(헤모글로빈) 7.3, Lactic 2.5, PO2 100, PCO2 30, Na+ 130, K" 5.6이에요." "C-line(중심정맥관, 대량의 수액공급이나, 응급 약물 투여 등..
전공의 일기. 4-9화 "환자분 눈 떠 보세요. 수술 끝났어요, 환자분 눈 뜨세요." 환자는 아직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환자가 마취가 된 지 벌써 4시간이 넘게 흐른 상황이었다. 마취과 교수님과 회복실 간호사는 환자의 활력징후를 지속적으로 확인하며, 환자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몇 분이 지났을까? 환자의 마취 상태를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뇌파 장치가 환자의 의식이 회복되고 있는 상황을 알려왔다. "환자분 눈 뜨세요, 수술 끝났습니다. 눈을 뜨셔야 입에 있는 관을 제거해 드릴 수 있어요." 환자는 통증 때문인지 제어가 되지 않는 몸부림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수술대에서의 낙상을 방지하기 위해 환자를 고정하는 체스트 밴드와 니 밴드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몸에 힘 빼시구요. 어서 숨을 크게 쉬세요. 마취가스가..
전공의 일기. 4-8화 "똑바로 고정해봐! 자꾸 흘러내리잖아!" "네! 죄송합니다." 수술을 시작한 지 1시간이 흘렀다. 후복막에 고정된 신장은 그 형체를 드러냈다. 검붉고 울퉁불퉁 제멋대로 생긴 우측 신장이 후복막강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었고, 주변 조직은 염증의 여파로, 단단하게 유착되어 있었다. 신장을 박리해 나갔다. 혹여나 종양을 잘못건드려 터지기라도 한다면, 후복막은 물론 복강 내로의 전파도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긴장하고 있었다. 미세한 혈관들을 혈관 클립으로 결찰해 나가며 수술은 너무도 섬세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ABGA 팔로우업 해주세요" 마취과 교수님의 요청으로 환자의 동맥에서 채혈이 진행되었다. 현재까지는 출혈도 없고, 순조로웠다. 혈압은 수축기 100정도 되었고, 심박수도 안정적이었다. "박..
전공의 일기. 4-7화 수술실 벽은 온통 초록색이다. 수술포도 초록색이다. 눈에 피로를 덜어주고, 피와 섞여도 그다지 거부감이 없는 갈색으로 변한다. 내가 다음날 마주한 투석환자의 모습은 수술대에 누워, 마취 기계에 숨을 의존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와 나의 감정의 골은 수술대 앞에서는 의미없었다. 나는 의사로서 수술대에 누운 환자 곁에 섰다. 발가벗은 몸에 붉은 소독약으로 복부와 회음부를 소독했다. 소독약이 점차 말라갔다. 하얀 방포로 소독 부위에 남아있는 약물을 제거했다. 핑크색 소독약을 이용하여 소독 부위를 다시 한번 닦아내고는 수술포로 환자를 덮었다. 수술에 필요한 기구들을 쓰기 좋게 배열했다. 준비가 끝났다. "타임아웃 진행하겠습니다." "환자분 등록번호 확인했습니다. 환자분 성함 확인했습니다. 환자분 생년월일 확인했습..
전공의 일기. 4-6화 "환자분 제가 설명드린 내용들을 이해하실 수 있겠어요? 더 궁금하신 건 있으실까요?" "없어" "여기 환자분께서 수술에 관한 사항들을 저에게 설명들으셨고, 이해하셨으면 체크해주시고, 성함, 싸인을 해주세요." 1시간이 걸렸다. 환자의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 더 신경써서 설명했고, 최악의 상황까지 설명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사망에 이르는 경우는 없으나, 확률이 제로는 아니라는 부연설명을 추가하긴 했다. 환자와 보호자는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궁금한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긴장 때문일 것이다. 어느덧 수술은 이틀 뒤로 다가왔다. 병실을 나와 복도를 걸었다. 신관과 본관을 연결하는 구름다리의 통유리를 통해 저 멀리 주문진 바다가 들어왔다. 노을이 짙게 깔린 바다는 아름다웠다. '강릉까지 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