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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의 일기./하늘파란 강릉에서21

전공의 일기. 4-9화 "환자분 눈 떠 보세요. 수술 끝났어요, 환자분 눈 뜨세요." 환자는 아직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환자가 마취가 된 지 벌써 4시간이 넘게 흐른 상황이었다. 마취과 교수님과 회복실 간호사는 환자의 활력징후를 지속적으로 확인하며, 환자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몇 분이 지났을까? 환자의 마취 상태를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뇌파 장치가 환자의 의식이 회복되고 있는 상황을 알려왔다. "환자분 눈 뜨세요, 수술 끝났습니다. 눈을 뜨셔야 입에 있는 관을 제거해 드릴 수 있어요." 환자는 통증 때문인지 제어가 되지 않는 몸부림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수술대에서의 낙상을 방지하기 위해 환자를 고정하는 체스트 밴드와 니 밴드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몸에 힘 빼시구요. 어서 숨을 크게 쉬세요. 마취가스가.. 2020. 7. 26.
전공의 일기. 4-8화 "똑바로 고정해봐! 자꾸 흘러내리잖아!" "네! 죄송합니다." 수술을 시작한 지 1시간이 흘렀다. 후복막에 고정된 신장은 그 형체를 드러냈다. 검붉고 울퉁불퉁 제멋대로 생긴 우측 신장이 후복막강 대부분을 점유하고 있었고, 주변 조직은 염증의 여파로, 단단하게 유착되어 있었다. 신장을 박리해 나갔다. 혹여나 종양을 잘못건드려 터지기라도 한다면, 후복막은 물론 복강 내로의 전파도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긴장하고 있었다. 미세한 혈관들을 혈관 클립으로 결찰해 나가며 수술은 너무도 섬세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ABGA 팔로우업 해주세요" 마취과 교수님의 요청으로 환자의 동맥에서 채혈이 진행되었다. 현재까지는 출혈도 없고, 순조로웠다. 혈압은 수축기 100정도 되었고, 심박수도 안정적이었다. "박.. 2020. 7. 24.
전공의 일기. 4-7화 수술실 벽은 온통 초록색이다. 수술포도 초록색이다. 눈에 피로를 덜어주고, 피와 섞여도 그다지 거부감이 없는 갈색으로 변한다. 내가 다음날 마주한 투석환자의 모습은 수술대에 누워, 마취 기계에 숨을 의존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와 나의 감정의 골은 수술대 앞에서는 의미없었다. 나는 의사로서 수술대에 누운 환자 곁에 섰다. 발가벗은 몸에 붉은 소독약으로 복부와 회음부를 소독했다. 소독약이 점차 말라갔다. 하얀 방포로 소독 부위에 남아있는 약물을 제거했다. 핑크색 소독약을 이용하여 소독 부위를 다시 한번 닦아내고는 수술포로 환자를 덮었다. 수술에 필요한 기구들을 쓰기 좋게 배열했다. 준비가 끝났다. "타임아웃 진행하겠습니다." "환자분 등록번호 확인했습니다. 환자분 성함 확인했습니다. 환자분 생년월일 확인했습.. 2020. 7. 24.
전공의 일기. 4-6화 "환자분 제가 설명드린 내용들을 이해하실 수 있겠어요? 더 궁금하신 건 있으실까요?" "없어" "여기 환자분께서 수술에 관한 사항들을 저에게 설명들으셨고, 이해하셨으면 체크해주시고, 성함, 싸인을 해주세요." 1시간이 걸렸다. 환자의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 더 신경써서 설명했고, 최악의 상황까지 설명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사망에 이르는 경우는 없으나, 확률이 제로는 아니라는 부연설명을 추가하긴 했다. 환자와 보호자는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궁금한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긴장 때문일 것이다. 어느덧 수술은 이틀 뒤로 다가왔다. 병실을 나와 복도를 걸었다. 신관과 본관을 연결하는 구름다리의 통유리를 통해 저 멀리 주문진 바다가 들어왔다. 노을이 짙게 깔린 바다는 아름다웠다. '강릉까지 와서.. 2020. 7. 23.
전공의 일기. 4-5화 '고혈압, 당뇨, 만성 신장질환, 대동맥 판막 역류 coa-battery(환자의 혈액응고 상태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지표) abnormal(비정상), anemia(빈혈) 준비할게 많다. incision(절개)은 정중 절개, 림프절 박리도 해야겠고, 수술시간은 3시간 이상 걸리겠네. ICU(중환자실)도 arrange(요청)해야겠어.' 수술 이틀 전 환자의 상태를 점검하면서, 동의서를 출력했다. 일반적인 위험도를 갖는 환자들은 보통 하루전날 입원하여 다음날 수술을 진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환자는 기저질환으로 수술 중, 수술 후 위험도가 다른 환자들보다 매우 높았기 때문에 미리 입원을 한 것이다. 대학병원 내지 3차 병원의 경우, 상대적으로 중증도가 높은 환자군이 모여들기 때문에 수술 전에 수술과 .. 2020. 7. 22.
전공의 일기. 4-4화 "환자분 투석실에서 도착하셨습니다." 5분이 지났을까? 환자가 투석실에서 병실로 이동해왔다. 휠체어에 타고 있는 환자의 모습을 보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독기 가득했던 눈은 반쯤 감겨있었고, 투석으로 진이 빠졌는지 영 맥이 없는 모습이었다. 요란한 환자 도착 소식으로 보호자가 깨어났다. "안 힘들었어? 땀은 왜 이렇게 많이 났어. 어쩌면 좋아" 보호자는 나를 본체만체하고는 환자에게 달려 나갔다. 환자는 대꾸할 여력도 없는지 휠체어에서 간신히 일어나 침대로 옮겨갔다. 아침에는 오른쪽으로 누 운상태였지만, 이번에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투석이 많이 힘드셨죠? 첫 투석인데 그래도 잘 이겨내셨어요. 고생하셨습니다." "......" 환자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이제는 정말 지쳤다는 듯 눈을 감았다. "선생님.. 2020. 7. 22.
전공의 일기. 4-3화 매일 오전 교수님의 회진 전 환자를 먼저 찾아 밤사이 불편한 점이 있었는지를 확인하는 pre-rounding을 시행한다. 이 시간은 차트에서는 확인할 수 없는 많은 정보를 얻어낼 수 있는 시간이기에, 소홀히 할 수 없다. 어제 나와의 다툼이 있었던 만성 신장질환 환자는 교수님의 회진 이후 생각을 바꾸어서 투석을 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깔끔한 결정 과정은 아니었다. "잘 주무셨어요? 어젯밤사이 불편한 점은 없으셨어요?" "......" 환자는 오른쪽으로 돌아누운 채 내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았다. 내 마음은 왼쪽으로 돌아누운 상태였기에, 답변을 기다리지 않고 병실을 나섰다. 병실 입구를 나서는데, 화장실 쪽에서 걸어오는 환자의 배우자를 만났다. 밤새 걱정으로 심란해진 얼굴을 깨끗이 씻고 나온 것 같았다. .. 2020. 7. 21.
전공의 일기. 4-2화 하루가 지났다. 환자의 상태는 2주전 입원하기 전 상태보다, 더욱 악화되어 더 이상 투석을 미루면 안되는 시기였다. "당장 오늘부터는 투석을 진행하셔야 하겠습니다. 더 이상 지체하기가 어려워요. 수술은 수술대로 준비를 하고, 투석을 해서 전해질 수치를 맞춰야 합니다." "무슨 투석을 해, 수술이나 해줘" 환자는 여전히 투석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었고, 기계장치에 의존해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불안한 듯 보였다. 환자의 칼륨수치(포타슘, K+)는 이미 정상 상한치를 2이상 웃돌고 있었고, 소변량은 하루에 600cc를 넘지 못하고 있었다. 몸은 점차 붓기 시작했고, 정강이를 살짝 누르면, 압박부위가 다시 부풀어오르지 못하는 pitting edema를 보이고 있었다. 이대로 지속되다가는 심정지나 폐부종으.. 2020. 7. 20.
전공의 일기. 4-1화 강릉으로 파견을 갔을 때, 나는 환자를 잃었다. 만성 신장질환을 앓고 있었던 60대 남자였다. 양쪽 신장은 이미 그 기능을 대부분 소실했고, 투석을 해야하는 상황이었지만, 환자는 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한동안 병원을 찾지 않았었다. 환자가 다시 병원에 내원했을 때에는 기능을 소실한 신장 중, 우측 신장에서 악성종양이 의심되는 병변이 생겨난 때였고, 그 크기가 이미 15cm를 넘어선 상황이었다. 신장의 세로길이가 14cm 정도 되는 것을 감안하면, 종양의 크기가 상당히 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측 신장을 절제하기 위한 수술을 준비했다. 고혈압과 당뇨, 만성 신질환으로 환자의 혈액검사 결과는 상당히 좋지 않은 상황이었고 수술 전 시행한 심장 초음파에서도 이상이발견되었는데 좌심실과 대동맥의 역.. 2020. 7.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