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누굴 닮아서 그렇게 퍼주길 좋아하니.
아이들이 어린이집에서 돌아왔다. 차에서 내리는 얼굴에 장난기와 웃음이 반쯤씩 피어있는 모습을 보니 오늘도 어린이집에서의 활동들이 꽤나 마음에 들었나 보다. 아이들을 통학버스에서 받아 집으로 데려오면, 나의 아이들은 자연스레 옷을 모두 벗어던지고, 화장실로 향한다. 미리 물을 받아 둔 욕조에 몸을 담그기 전 손 씻기를 잊지 않는다. 전례 없는 전염병이 한창 씻기 싫어할 아이들에게도 마수를 뻗친 것 같아 속상하다. 아이들이 욕조에 들어가면 그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나 아내를 쪼아 본다.
'엄마, 아빠 뭐 잊은거 없어요?'
나 혹은 아내는 아이들 키가 닿지 않는 높은 찬장의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알록달록한 사탕을 두 개 꺼내어 아이들에게 건넨다. 사탕을 입에 문 남매는 그제야 자신들만의 공간에서 즐거운 목욕놀이를 시작한다.
요즘 아들은 목욕후에 머리를 말리며, 엄마에게 난처한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엄마, 오늘 먹은 이 사탕이 너무나 달콤한데, 내일 어린이집에 가져가서 친구들 나눠줘도 될까요?"
또박또박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아들이 대견하게 느껴져, 아들의 어린이집 가방에 정성스레 사탕을 포장해서 넣어주었다. 물론 아내가 했다.
아들은 그 이후에도 몇 차례 사탕 나눠주기를 하고 싶다며 엄마를 난처하게 했다. 사탕이 비싸서라기 보다는 아들이 친구들에게 사탕을 나눠주는 것을 못마땅해할 부모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주려는 아들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한동안 우리 부부의 대화 주제는 '아들이 왜 사탕을 나눠주려고 하는가?'였을 정도였다.
아들은 그토록 맛있는 사탕을 왜 나눠주려 했을까?
한 삼십년 전쯤? 내가 아들 나이였을 적에 나의 부모님은 욕심을 부리지 말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말며, 남을 먼저 생각하라 가르치셨다. 밥상머리에서 뿐만이 아니었다. 학교와 어린이집, 유치원에서는 '착한 어린이'가 되라며 가르쳤고, 흰 배경에 포도송이를 그려놓고, 남을 위해 혹은 공동체를 위해 선행을 하면 포도송이를 채워 넣을 예쁜 스티커를 주며 이타적인 삶을 살도록 교육했다. 포도송이를 스티커로 다 채워 넣은 아이는 조회대에 올라 '착한 어린이 상'을 받을 기회가 주어졌고, 이는 대단한 영예였다.
시간이 흘렀고, 대낮에도 현관문을 걸어잠그지 않으면 불안한 세상이 도래했다. 세상은 여의도의 증권가 빌딩처럼 각 잡혀 돌아가기 시작했고, 남들보다 내 것을 더 쌓아야 인정받고, 내 것을 쌓지 못하면, 남의 것을 부서뜨려서라도 이겨야 한다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내 것을 챙기기도 어려운데 남에게 자신의 소중한 사탕을 나눠주는 내 아들에게 나는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한참을 고민한 끝에 나는 내 방식대로 아들을 이해했다.
"여보 준현이는 사탕을 친구들에게 나눠주며, 자신의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하는 것일지도 몰라."
아내는 대답이 없었다. 현명한 아내는 나보다 더 큰 그림을 보고 있었지만, 답을 제대로 찾았다며 속 시원해하는 나를 보며 편하게 생각하라고 내버려 뒀을 것이다.
한동안 나와 아내를 괴롭혔던 아들의 '사탕 나눠주기'는 이 시대를 살아가며 쩔어버린 아빠의 빗나간 시선으로, 그 의미가 퇴색되어 버렸다. 아들의 사탕 나눠주기 또한 다른 친구들의 엄마 아빠가 좋아하지 않을 것이란 우리 부부의 판단으로 중단되었다.
몇 달이 흘렀고, 아들의 사탕 나눠주기는 까맣게 잊혀졌다. 일상에 파묻혀 바쁜 하루를 보내던 와중에 아들이 다니는 어린이집에서 부모면담 날짜를 정하라는 공지가 왔다. 아내에게 무리를 해서라도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아들의 선생님이 우리 부부의 아들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내가 생각한 나의 아들은 다른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주며 우쭐감을 느낄 줄 아는, 차갑고, 목표지향적인 단단한 아이였다.
"아버님, 준현이는 세상 따뜻한 아이예요. 남에게 베풀줄 알고, 해를 끼치지 않아요. 자기 놀이에 집중하는 아이이구요. 무엇이든 친구들과 나누며 행복해하는 아이랍니다. 다만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면, 끈기가 조금 부족하구요. 운동신경이 조금......"
'네? 제 아들이 따뜻하고, 끈기가 부족하고, 운동신경이 모자라다구요?'
내 생각 속의 내 아들은 그냥 생각 속의 아들이었나 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변에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면담이 끝났다. 며칠의 혼란기가 찾아왔다. 나는 아빠이면서 자식을 모르고 있었구나 하는 죄책감이 들었고, 이 각박한 세상을 헤쳐나갈 지혜를 아들에게 심어주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생겼다.
아들에게 나는 어떤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까? 이제 다섯 살이 된 아들에게 '세상은 만만한 곳이 아니야.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자신의 몫은 꼭 챙겨야 해' 라고 교육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남에게 베푸는 삶은 행복해. 영혼까지 끌어모아 남에게 이로운 일을 하는 착한 호구가 되어야 해' 라고 가르쳐야 하는것인가? '양 극단의 중간쯤 적당한 지점을 찾아 네 삶의 방식을 찾고 가슴이 이끄는 대로 해' 라고 가르칠 것인가?
우연히 한 권의 책을 접했다. 답을 찾기에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제목의 책이었지만, 그곳에 답이 있었다.
행복의 측면에서, 다른 사람에게 투자한 효과는 가장 가치가 있는 것, 즉 자신이 보물처럼 여기는 것을 베풀 때 가장 높게 나타난다.
- 당신이 지갑을 열기 전에 알아야 할 것들, 중에서
이 책의 저자인 하버드대의 마이클 노튼과 같은 학교 출신의 젊은 심리학자인 엘리자베스 던은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을까? 에 대해 심리학적, 뇌과학적 고찰을 시행했고, 이 책의 말미에 저자들은 자신의 행복감을 극대화시키는 방법으로 자신의 소중한 것을 나누는 경험이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제시했다. 한 푼이라도 더 벌겠다며 아등바등거리는 현실세계에서 무슨 배부른 소리냐며 비판할 수 있지만, 상상조차 하기 힘든 부를 축적한 워렌 버핏과 빌 게이츠의 사회 환원의 사례를 살펴보면 결국 부는 행복을 위한 수단이고, 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가치 있는 활동은 베풂이라는 결론에 닿게 된다.
다섯 살 아들이 보여준 '사탕 나눠주기'는 달콤한 사탕을 입에 물었다는 행복감보다 더 큰 나눔의 기쁨'을 나의 사랑스러운 아들에게 선사했을 것이다.
나의 고민은 이제 해결이 되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자신의 소중한 것을 나누며 행복을 느끼는 방법을 스스로 체득한 나의 아들에게 나는 가르침을 얻었다.
사랑하는 아들아. 그래도 적당히 나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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